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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1994년 ‘김일성 사망’ 막전막후…남북은 ‘총성 없는 외교전’ [비밀 외교문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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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38만쪽 공개

제네바 합의·남북 정상회담 등 ‘격동의 한반도’

북한 김일성 생일 맞아 동상에 헌화하는 주민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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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문혜현 기자]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한 뒤 한반도에 몰아친 긴장감을 고스란히 담은 1994년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외교부는 28일 이같은 내용이 담긴 ‘제 32차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총 2506건, 38만여 페이지를 일반에 공개했다.

정부는 국민 알권리 보장과 외교 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매년 공개하고 있다. 외교부는 1994년 외교 문서들을 일일이 정리해 예비심사, 실무 검토, 심의위원회를 거쳐 최종 발표한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제3단계 미북 고위급 회담과 제네바 합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17일 앞두고 벌어진 김 주석의 사망 등 당시 급박했던 한반도 정세 관련 외교 문서다.

먼저 1994년 7월 8일 김 주석이 사망하자 평양방송은 다음날인 9일 김 주석 사망을 발표하며 관련 내용을 지속 방송했다.

우리 측 외무부는 즉시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주재 대사관에 김 주석의 사망과 경위, 북한 내부 동향, 향후 북한 정세 전망 등을 파악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일부 북한 공관들은 김 주석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주루마니아대사관은 김 주석의 사망이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으로 파악해 보고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당시 외무부는 차관을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반을 가동하고 전 재외 공관에서도 비상근무 체제로 돌입했다”며 “각종 정보 수집이라든지 여러 가지 대책과 대응 방안을 담은 많은 문서들이 생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당시 한반도에선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며 “북한 핵 문제와 제네바 합의,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 김영삼 대통령의 주변국(중국, 일본, 러시아) 방문 등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고리는 바로 김 주석 사망”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주돈식 청와대 대변인은 김 주석의 사망 관련 발표에 나섰고, 김영삼 대통령은 전군 비상경계 태세를 지시했다. 이어 한국의 기존 정책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했는데, 특히 한반도 위기감을 조성하는 외신 논조를 방지하는 등 한국의 평화지향적인 모습을 부각하도록 조치했다.

각국은 속속 조의를 발표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일본의 무라야마 수상이 조의를 표했고, 중국의 강택민 주석과 이봉 총리가 공동 명의로 조전을 발송했다.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도 성명을 냈다. 유엔사무총장은 “역사적인 회담을 앞둔 부적절한 시기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곧이어 남북대화사무국은 김 주석 사망 3일 뒤인 1994년 7월 11일 김용순 북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 명의의 남북최고위급회담 연기 통지문을 접수했다. 남북 간 첫 대화가 무산된 것이다.

이같은 당시 상황에 대한 한미 간 긴밀한 협의가 나타난 대목이 눈길을 끈다.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는 계속 유효하다는 원칙 아래 대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클린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있었던 미국과 북한의 3단계 회담의 진전에 대해 설명하고, 향후 한국과 계속적인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불투명해진 데 대한 각국의 고민 섞인 반응도 엿볼 수 있다. 외교부 특수정책과에서 작성한 ‘김일성 북한 주석 사후 정세 및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승계 동향’을 살펴보면 클린턴 미 대통령은 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희망했지만, 러시아 아태국장은 상당 기간 정상회담이 연기될 것으로 관측했다. 실제 첫 남북정상회담은 김 주석 사망 6년 뒤인 2000년 6월 13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면서 이뤄졌다.

또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갈루치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외무부 부부장이 진행하기로 예정된 핵 문제 협의를 위한 제3단계 미북 고위급 회담이 보류됐다. 재개를 둘러싼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1994년 하반기 양측이 다시 협의에 나서면서 순항했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3차례 회의를 거쳐 북한의 핵무기 동결과 미국의 통상 및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제네바 합의에 이르렀다.

또 1994년 8월엔 무라야마 토미이치 일본 총리가 종전 50주년을 맞아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재차 드러내는 특별 담화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의 침략 행위나 식민지 지배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초래한 것에 대해 깊은 반성의 마음이다”라며 사과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사과와 반성을 표명하고 1000억엔 규모의 평화우호교류계획을 발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1995년 일본 현직 총리 최초로 나온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발언인 ‘무라야마 담화’보다 1년 전에 있었던 사전 담화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볼 수 있다. 6월 이후에는 ‘공개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을 통해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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