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 산불 피해 현장 취재 후기
더 태울 것이 없어 보일 만큼 잿더미가 된 집 터. 그런데 또다시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 잔불인 건가 아니면 새로 피어나고 있는 건가'. 취재를 마치고 홀로 남아있던 상황.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작은 불, 큰 불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바로 휴대폰에서 119를 눌렀다. 그런데 신호가 가질 않았다. '아 맞다. 여기 통신이 끊겼지'
휴대폰을 하늘로 높이 들고 자리를 조금씩 이동해 봤다. 순간, 불안하게나마 신호가 이어졌다. 겨우 연결된 119. "영덕읍 석리 따개비마을, 그 석동 방파제 옆인데요. 여기 또 불길이 올라와요.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마음이 급해 빠르게 말을 했는데, 답이 없었다. 그새 신호가 또 끊겨 있었다.
경북 영덕군 석리에 위치한 해안가 마을. 해안가 절벽에 집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따개비' 같다고 해서 '따개비 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이번 산불로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 폐허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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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19'. 다행히 119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전화가 많이 끊겨요.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네네 지금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지금 석리로 위치 찍히는데, 거기 잔불이 올라온다는 거죠?" 이렇게 서로 두 차례 전화를 주고받고 나서야 화재 신고를 접수할 수 있었다. 재난 현장에서 통신이 끊긴다는 건 단순한 '불편'이 아니었다. 또 불이 나도, 불이 났다고 신고하기 조차 힘든 '또 다른 위험'이었다.
집을 잃는다는 것
불은 멈출 줄 모르는데 그 외 모든 건 멈춰있었다. 인터넷도 통신도 전화도 전기도, 그리고 소중한 일상도. 통신과 전기는 서서히 복구가 되고 있지만 피해 주민들의 멈춰버린 일상은 언제 복구가 될지 기약이 없다.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이 전국 수천 명이다.
영덕군 피해 주민 대부분은 노년층이다. 이곳에선 70대 초반도 '청년'이라 봐야 할 만큼 고령층이 다수다. 안타깝게 화마로 돌아가신 고인 중엔 100살 어르신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자가 만난 이재민들 중엔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 집에서 지낸 분들이 많았다.
경북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는 영덕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 중 한 곳이다. 산불로 마을 대부분의 집 들이 불에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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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내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지품면 수암리에 거주하는 90살 홍병기 할아버지도 그런 분이다. 태어나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었고 마늘 농사, 사과 농사하며 평생을 살았다. 할아버지에게 영덕 땅은 평생 딛고 산 단단한 터전이었고, 부모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자식에게 또 손주에게 전하며 살아온 추억과 역사가 담긴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피해 지역 어르신들 중엔 짬이 나면, 체력이 되면 다 타버린 집을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재민 대피소에서 집까지 차로 20분, 30분씩 걸리는데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피소에서 만난 한 할머님은 기자에게 "전기만 들어오면 빨리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집에서 못 자도 마을회관은 멀쩡하니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랑 지내고 싶다면서. 추억과 역사가 깃든, 평생 딛고 산 그 땅과 터전을 쉽게 놓을 수 없는 마음. 아무리 기자가 귀를 기울여 경청해도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었다. 어르신들에게 집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살 곳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평생 정성을 다해 내린 뿌리가 뽑히는 일 같았다.
가족, 이웃을 잃는다는 것
'여긴 원래 아무것도 없던 공터였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옮겼다. 얼마 후, 마을 꼭대기에서 그 터를 다시 내려다봤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영정 사진을 든 남성,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울고 있는 여성, 눈물을 훔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 그리고 스님 한 분까지.
취재를 하며 나중에 알게 됐다. 그곳은 이번 화마를 미처 피하지 못한 1925년생, 올해 100세인 어르신이 사망한 장소였다. 그곳에도 집이 있었다. 무너지고 타버린 집 잔해물들을 거둬내고 치우자 그 안에서 고인이 발견됐다고 했다. 빈 터였던 것처럼 보였던 건 애초 실종자로 분류 됐던 고인을 찾기 위해 잔해를 모두 치웠기 때문이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고인은 건강 문제로 외지에 있는 자녀 집에서 머물다 이곳이 그리워 몇 주 전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모든 것이 지워진 곳에서 부모의 마지막을 보내드려야 하는 자식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웃들에게도 고인의 죽음은 무거운 부채로 남아 있었다. 이 마을에 사는 72세 김성국 씨는 산불이 밀려온 그날, 차로 사람들을 실어 마을 앞바다 방파제 끝으로 옮겼다. 급하게 대피를 하고 나서야 고인이 생각났다고 했다. 평소 아내와 함께 고인을 병원에 모시고 가기도 하고, 약이나 음식들도 챙기곤 했었다. "너무 불길이 세서 다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집 안에서 돌아가셨단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는데, 가슴이 미어지더라고. 죄송하고.." 재난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건 단순한 이별이 아니었다. 남은 자에겐 '구할 수도 있었다'는 자책감이 남는 일이었다.
이재민을 돕는다는 것
"아니 이거 남자 속옷이라 할머니들이 입을 수가 없어요. 여기 여자가 더 많은데 속옷은 남자들 게 더 많아. 좀 바꿔줘요"
이재민 대피소 한 곳이 웅성였다. 할머님들을 모시는 한 마을 이장님이 마침 찾아온 도의원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속옷, 얆은 담요, 수건, 칫솔 등 생필품이 담긴 '응급구호키트' 상자가 이재민들에게 배급 됐는데, 할머님들에게도 남성용 키트가 배급됐다는 것이다. 남성용은 파란색, 여성용은 빨간색 뚜껑이 달린 상자인데 그러고 보니 할머님들이 앉아있는 구역 곳곳에 비닐도 뜯지 않은 '파란 뚜껑 상자'가 눈에 띄었다.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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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을 피해 달아나느라 대부분의 이재민은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했다. 당시 입고 있던 옷 한 벌이 전부였던 경우가 대다수다. 다시 옷 가지를 챙기러 가고 싶어도 모든 게 타버려 불가능하다. 시간이 지나면 어디선가 구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불을 피해 허겁지겁 달려 나온 직후 며칠은 대피소에 배급되는 이런 응급구호키트가 간절하다. (응급구호키트는 지방자치단체 재해구호기금으로 마련된 구호 물품이다.) 알아보니, 응급구호키트가 성별 인원수까지 맞춰 지급되진 못하면서 여성용 키트가 인원수에 비해 부족했다. 비닐도 뜯지 않은 구호 상자들은 '구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대피소 현장이 집 같을 순 없다. 또,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보내오는 많은 온정의 손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귀한 것임을 이재민들은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부족함이 있어도 당사자들은 말하지 못한다. 불평, 불만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응급구호키트 해프닝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나니 대피소 앞에 쌓여있던 수백 개의 '씨리얼' 상자, TV 한 대 없는 대피소 실내 등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어르신들에게 씨리얼은 낯선 간식이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어르신들에겐 TV가 뉴스를 보는 가장 익숙한 수단이다. 씨리얼 소진 속도가 더딘 이유, "TV도 한 대 없다"는 어르신들의 푸념이 나오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기부에도 디테일이 필요하단 생각을 그 현장에서 처음 하게 됐다. 이재민들의 대피소 생활은 산불이 꺼져도 한참을 이어져야 한다. 가능하다면, 이재민의 구성과 필요, 이번 산불 피해 현장의 특수성을 감안해 지원 물품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어떨까 싶다. 돕기 위해 전달된 물건들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다행히 산불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진짜 재해는 지금부터다. 불은 한달음에 일상을 앗아갔지만 그 일상을 되찾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보다 더 큰 관심과 지원이 앞으로 지속돼야 한다. 마음을 추스르기도 부족한 시간이었을 텐데 '방송에 자꾸 나가야 피해 복구가 빨리 된다', '기자들도 고생한다'며 인터뷰와 취재에 도움을 주신 영덕군 이재민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전한다.
박수진 기자 star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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