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토안보부 산하 관세국경보호청(CBP)은 “(한국의) 태평염전이 천일염 제품 생산 과정에서 강제노동을 사용했음을 합리적으로 보여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염전에 대해 인도보류명령(Withhold Release Order)을 발령(2일)했다”고 3일 발표했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 누리집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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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단일 염전의 소금 제품이 장애인 강제노동으로 생산됐다는 이유로 미국으로부터 수입을 금지당했다. 한국 기업 제품이 ‘강제노동 상품’으로 규정돼 외국에서 통관 억류된 첫 사례다.
미국 국토안보부 산하 관세국경보호청(CBP)은 지난 3일(현지시각) “태평염전이 천일염 제품 생산 과정에서 강제노동을 사용했음을 합리적으로 보여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염전에 대해 인도보류명령(Withhold Release Order)을 발령(2일)했다”며 “즉시 모든 미국 입국 항구의 CBP 직원은 한국의 태평염전에서 공급되는 천일염 제품을 억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CBP는 세관, 이민, 국경 보안, 농업 보호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의 통합 국경관리기관이다. 이 기관은 “태평염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취약성 악용, 속임수, 이동 제한, 신분증 압수, 열악한 생활 및 근무 조건, 협박 및 위협, 물리적 폭력, 채무 속박, 임금 유보, 과도한 초과 근무 등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 지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단일 염전으로 국내 최대이며 1953년 조성된 태평염전(전남 신안군 증도)은 2007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됐다. 매년 국내 천일염의 약 6%(연간 1만6천톤)를 생산해 자체 브랜드 상품들을 판매할 뿐 아니라 국내 주요 식품 기업에도 납품하고 있다. 2018년 해양수산부는 “천일염의 식품화 및 선진화에 앞장선 공로”로 손일선 회장에게 ‘제12회 장보고대상’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염전 부지 대부분을 천일염 생산업자들에게 위탁하고 있는 태평염전에선 지적 장애인 강제노동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2021년 5월 이 염전에서 탈출한 장애인 노동자의 폭로(사실상 감금에 수사기관이 집계한 미지급 임금만 1억1500여만원)는 2014년에 이어 ‘2차 염전노동자 착취 사태’를 촉발시켰다.
2022년 1월26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염전 노동착취 사건 추가 피해 고발 및 진정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와 엄중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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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공익법센터 어필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원곡법률사무소는 태평염전 등 강제노동이 의심되는 한국산 천일염 기업들을 대상으로 CBP에 인도보류명령을 청원했다. 과거 장애인 착취로 처벌받은 사업장에서 다시 피해자가 발생했거나 계속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기업들이 공급망에서 강제노동을 근절하기까지 미국 내 유통을 중단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원 2년 5개월 만에 내려진 이 ‘명령’은 강제노동 제품이란 이유로 외국 정부가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수입을 중단한 최초 사례다. 1994년 일본 기업(비디오게임 등)이 ‘명령’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이 조처가 취재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명령’이 내려진 제품들은 생산 기업이 강제노동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해내야 다시 미국 시장에 풀릴 수 있다.
태평염전 소금에 인도보류명령을 내리면서 CBP 국장 대행 피트 플로레스는 “강제 노동에 맞서 싸우는 것은 CBP의 최우선 과제”라며 “강제 노동으로 만들어진 제품은 미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조했다. CBP는 전 세계 약 2800만명의 노동자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의회도 지난해 11월 강제노동 제품의 유통을 전면 금지하는 규정을 통과(2027년 시행)시키는 등 국제사회의 ‘비윤리적 공급망’ 규제는 강화되고 있다.
태평염전 관계자는 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미국 쪽 거래처를 통해 (현지) 통관이 안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태평염전은 장애인 노동자들 착취를 일부 위탁 염주들의 문제로 치부해봤다.
1994년 일본 기업(비디오게임 등)이 미국 관세국경보호청의 ‘인도보류명령’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이 조처가 취재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 누리집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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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번 조처엔 끊이지 않는 강제노동 피해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방치해온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책임이 크다. 2014년 염전 장애인 노동자 착취 사태 뒤 지금까지 근로기준법상 ‘강제근로 금지’(제7조) 위반으로 처벌받은 가해자는 단 한 명뿐이고 형량도 징역 1년 2개월에 그쳤다. 그나마 처벌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기나 횡령, 폭행 혐의 등이 적용됐다. 구조된 경우에도 염전 피해자에 대한 재활과 사회복귀 시스템의 부재 탓에 염전으로 되돌아가거나 가난하고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CBP ‘명령’의 계기가 된 사건 피해자 중 한명인 정진만(가명·62)씨는 재판의 최종 결과도, 가해자로부터 사과도, 피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투병하다 지난 설날 구조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도보류명령 청원을 낸 어필·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원곡법률사무소는 6일 CBP의 결정을 환영하며 “정부는 강제노동 근절을 위한 인신매매방지법 등을 개정해 (현재는 없는) 처벌 조항을 신설하고 강제노동 범죄의 구성요건을 구체화하라”고 요구했다. 태평염전 등 기업에도 “생산 과정에서 강제노동이 근절될 수 있도록 인권 실사를 이행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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