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이른바 ‘DJP 연합’을 결성하고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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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DJ의 국민회의와 JP의 자민련이 손을 잡았다. 이른바 DJP 연합이다. 그에 따라 JP는 대권 도전을 포기하는 대신 여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 후보에 맞서 DJ를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DJ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 총리직은 자민련에 넘기는 것을 비롯해 두 정당이 장관직을 나눠갖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새 대통령 임기 중 의원내각제 개헌을 단행하는 방안까지 포함됐다. DJ가 당선되고 이듬해인 1998년 3월 출범한 첫 내각은 국민회의·자민련 연정의 외형을 갖췄다. JP가 총리를 맡고 장관 자리 17개 중 7개에도 자민련 또는 자민련이 추천한 인사가 포진했다. 언론에선 “내각제 예행 연습을 보는 듯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호기롭게 출범한 DJP 연합 정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DJ와 JP가 합의한 내각제 개헌이 도통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내 1당인 한나라당이 대통령제 유지를 더 선호한 탓도 있겠으나, DJ 역시 내심 내각제에 비판적 생각을 가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대북 유화론자인 DJ가 임기 내내 펼친 이른바 ‘햇볕정책’을 둘러싼 국민회의와 자민련 간 의견차도 심각했다. 2001년 9월 햇볕정책의 전도사라 할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 자민련은 한나라당과 공조해 해임안 가결을 이끌어냈다. 내각제에 비유하면 연정에 참여했던 정당이 탈퇴를 선언하고 내각 불신임에 가담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DJP 연합은 공동 정부 출범 후 3년여 만에 완전히 붕괴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7년 11월 이른바 ‘DJP 연합’ 결성에 합의한 직후 한 자리에 모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왼쪽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 박태준 전 국무총리. DJP 연합에 박태준도 합류하면서 혹자는 박태준의 이름 첫 글자 이니셜까지 포함시켜 ‘DJT 연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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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대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느닷없이 20여년 전의 DJP 연합을 소환했다. 최근 이 후보 캠프에 합류한 보수 진영 인사들이 27일 발표한 ‘진짜 보수 민주 선언문’을 통해서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P 연합을 통해 분열된 정치를 통합으로 이끌었다”며 “나라의 위기 앞에서 다시 한번 보수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DJP 연합은 외연 확장을 통해 집권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내부의 화학적 결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분열로 끝을 맺었다. 한국 정치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이때 DJP 연합은 그리 바람직한 모델 같아 보이진 않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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