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촌에 위치한 오이타 식물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세종문화회관의 ‘일무의 시간’ 워크숍 [세종문화회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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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포물선을 그린 줄기 아래로 뒤엉킨 흙을 털어내자, 토양 아래로 파묻혀 보이지 않던 근사한 뿌리가 고개를 내민다.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흙을 털어내고, 잔뿌리 사이로 엉켜 든 작은 돌멩이들을 걷어낸 뒤 새로운 안식처가 될 작은 화분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제야 다시 보이는 것은, 식물이 보내온 시간이었다. 야무지게 뻗은 가지와 푸릇하게 채색된 잎사귀엔 몇 번의 계절을 지낸 인고의 시간이 쌓였다.

“흙 속에 묻힌 뿌리를 꺼내 찬찬히 들여다보고, 식물을 새로운 화분에 옮긴다는 것이 제겐 우리의 전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창작춤인 일무의 작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 서촌에 위치한 오이타 식물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세종문화회관의 ‘일무의 시간’ 워크숍. 서울시무용단의 ‘일무’ 개막을 앞두고, ‘춘앵무’ 모티브를 적용한 분재 워크숍에서 만난 무용단 단원 유재성(38)은 이렇게 말했다. ‘일무의 시간’엔 이재성을 비롯한 일반인 참가자 4명이 함께 했다.

분재는 식물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떤 것은 동그랗고, 어떤 것은 뾰족한 이파리를 가진 작고 귀여운 식물. 자연의 수리처럼 눈에 띈 나무나 화초를 골라 줄기와 가지를 다듬고, 흙을 털어내 새로운 화분에 옮기는 것이 분재의 과정이다. 섬세하고 느린 이 작업은 한국의 전통춤을 해석해 온 서울시무용단의 작업과 다르지 않았다. 최문정 오이타 스튜디오 작가는 “‘일무의 시간’은 전통이 본질에 자리하고 있으나,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두 분야(일무, 분재)의 협업”이라고 했다. 이 자리를 통해 ‘미래의 관객’이 될 참가자들은 분재를 경험하고 전통춤의 가치와 그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덧입히고 있는 무용수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창단 60주년을 기념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서 선보인 최현석 셰프의 미식 경험 ‘헤리티지 만찬’ [세종문화회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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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이 달라졌다. 쏟아지는 공연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차별화 전략’이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전략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관객들의 ‘경험과 이해 확장’이다.

공연계 관계자는 “넷플릭스, 티빙과 같은 OO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에 이어 경험재를 파는 백화점과 호텔까지 공연장의 경쟁자들이 늘고 있는 때에 지난 몇 년 사이 극장에서도 변화에 맞춘 전략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커졌다”고 말했다.

세종문화회관은 올해부터 ‘세종 인스피레이션’ 시리즈를 시작했다. 공연예술의 경계를 넘어 공간, 장르, 감각을 확장하는 새로운 극장 경험을 주기 위해 시작한 실험적 시리즈다.

첫 시도는 지난 4월이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창단 6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서 최현석 셰프와 협업한 만찬을 선보였다. 만찬을 포함해 50명 한정으로 서울시국악관현악단 공연의 VIP 티켓을 20만원에 판매했다. 최현석 셰프는 ‘지휘자’로 변신, 전통과 동시대의 조화를 강조해온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예술성을 미식으로 재해석한 만찬(한식적 식감을 가미한 수제비 봉골레, 화려한 오방색이 담긴 궁중 갈비찜, 수막새 모양의 디저트)을 선보였다.

‘일무의 시간’도 소수의 관객을 위한 이벤트로 분재 워크숍과 ‘일무’ VIP 티켓을 30만원에 내놓았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공연 콘텐츠에 다양한 예술 형식을 융합, 일종의 오감 자극 ‘복합 문화 경험’ 플랫폼으로의 가능성을 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획기적 실험은 아닐지라도, 여러 국공립 극장에선 공연 개막을 앞두고 관객에게 깊숙이 다가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오픈 리허설이나 클래스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국립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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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은 산하 단체인 국립무용단의 ‘사자의 서’ 개막을 앞두고 무용수들에게 안무를 직접 배워볼 수 있는 ‘오픈 클래스’를 준비 중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보이그룹 사자보이즈가 인기를 얻는 때에 전통버전인 국립무용단 사자보이즈가 가르쳐주는 ‘사자의 서’ 안무다. 앞서 유니버설발레단에선 ‘백조의 호수’ 개막 전 관객 70여명을 대상으로 ‘오픈 리허설’을 진행했다.

예술의전당에선 백희나 작가의 동명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달샤베트’ 개막을 앞두고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톡톡(Talk Tok)! 시리즈: 백희나 그림책 편’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 어린이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확장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관객이 예술의전당 안에서 다양한 문화예술을 경험하고, 그 경험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시도는 극장 경험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만하다. 극장이 단지 공연 한 편을 보고 떠나는 곳이 아닌 다양한 체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이러한 시도는) 변화하는 관객의 감수성과 문화 소비 방식에 대한 극장의 고민을 반영한 결과”라며 “전통적인 공연 형식과 공간만으로는 관객과 충분히 소통하기 어려운 시대에, 극장은 보다 유연하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예술적 접점을 확장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극장의 역할과 가능성을 재정의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포화 상태의 공연 시장에서 극장들의 생존 전략은 반응이 좋다. ‘세종 인스피레이션’ 시리즈 중 서울시발레단의 작품(요한 잉거 워킹 매드 & 블리스)과 연계해 지난 4월 선보였던 ‘리스닝 스테이지’에선 전체 구매자 41명 중 10명(24%)이 해당 작품을 예매했다. 오픈 클래스는 공연 콘텐츠와 관객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는 데에 안성맞춤인 전략이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오픈 클래스를 진행하면 관객들이 동작이 지닌 의미나 표현 방식을 구체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친밀감이 훨씬 높아지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