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매경춘추] 재정건전성의 갈림길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국가의 재정건전성과 국민의 소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대다수의 연구는 정부 부채 비율이 낮은 국가의 국민 소득이 부채 비율이 높은 국가보다 높게 관찰된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이 같은 단순 상관관계로는 정책적 함의를 도출할 수 없다. 단순 상관관계는 부채 비율과 소득 중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두 변수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어도 제3의 요인에 의해 상관관계가 관찰될 수도 있다.

필자는 주요 국가의 장기적인 재정건전성과 소득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정부 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나면 국민 소득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필자가 최신 국제 통계치를 사용해 18개 주요 선진국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일반정부 부채 비율과 1인당 국내총생산(GDP)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확인됐다.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의 평균값인 90%와 1인당 GDP 평균값인 6만3000달러를 기준으로 해당 국가들을 4개 그룹으로 나누어 보니, 대부분이 2사분면(부채 평균 이하, 소득 평균 이상) 또는 4사분면(부채 평균 이상, 소득 평균 이하)에 분포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2사분면에 속한 국가는 이른바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그룹이다. 반면 4사분면에 속한 국가는 나쁜 균형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2사분면과 4사분면에 대부분의 관찰점이 존재하는 것은 정부 부채와 국민 소득이 음의 상관관계에 있음을 방증한다.

4사분면에는 남유럽 국가와 일본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대 초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에서는 재정위기가 경제위기로 확산하며 국민 소득이 감소한 바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재정 적자 급증과 장기 침체를 겪었다. 이들 사례는 재정건전성 훼손이 국제 신인도 하락 또는 국가 채무의 과도한 축적이라는 경로를 통해 빠르게 또는 서서히 국민 소득을 낮출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강력한 재정준칙과 의회의 예산권 견제 수단을 갖춘 호주, 독일,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는 중장기적으로 국민 소득이 증가해 2사분면에 군집을 이루었다. 다만 독일은 최근 대규모 국방 및 인프라스트럭처 투자를 추진하고 있어 재정건전성 훼손이 우려된다.

우리나라는 지난 30년간 소득과 부채가 동시에 빠르게 증가해 왔지만, 아직 두 수치가 모두 평균값 이하인 3사분면에 속해 있다. 앞으로의 노력과 대응에 따라 남유럽 국가의 전철을 밟거나 호주, 스위스 등과 함께 모범 사례로 거론될 수도 있다.

중장기 재정건전성을 견지할 조치가 필요하다. 재정준칙 도입, 예산 소요 또는 세입 감소를 수반하는 법률안에 대해 재원 조달 방안을 의무화하는 페이고(Paygo) 원칙 도입, 국회의원이나 행정 수반의 예산 편성권 견제 수단 강화, 세입 확충 노력 강화, 예산사업에 대한 사전타당성조사와 사후 성과 관리 강화를 통한 예산 절감 등이 그것이다.

사후 평가에서는 특히 여러 중앙부처와 지방정부에 흩어져 있는 인구, 교육, 지역 균형, 복지 등 동일 목적 지출을 함께 평가해 예산 효율화를 추진하는 재정사업 영향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의 갈림길에서 좋은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이영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