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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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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없이 처가·시댁에 전도… 의성에 100년 교회 42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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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 [11] 경북 의성의 교회들

    조선일보

    1900년 설립된 의성 지역 최초의 교회인 비봉교회. 오른쪽 비석은 지난 2000년 세워진 '선교 100주년 기념비'.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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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도 이 종(鐘)을 아흔두 번 울렸습니다. 92세 교인이 돌아가셔서요. 마을에서 누가 돌아가시면 교회로 제일 먼저 연락이 옵니다. 마을 70호 가운데 50명 정도가 교인이시거든요. 옛날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교인이었다고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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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비봉교회 종탑(왼쪽)과 첫 예배당 건물. 초가에서 지붕은 바꿨지만 내부는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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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 경북 의성 비봉교회 김관우 목사는 교회 앞 오래된 종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비봉교회는 1900년 설립된 의성 지역 최초의 교회다. 의성군은 인구 4만8000여 명으로 인구 소멸 우려 지역이지만 100년 교회가 42곳이나 된다. 전체 교회 수는 150개. 골짜기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다. 의성 지역 교회들은 서양 선교사의 도움 없이 지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국내 개신교 역사에서 드문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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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군 최초 교회인 비봉교회의 옛 예배당 내부.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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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교회는 이 마을 주민 김수영씨가 청도 장터에서 전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1862~1931) 선교사에게 세례 받고 돌아와 마을 주민들과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다. 1902년엔 초가 예배당을 마련했는데, 지금도 교회 옆에 옛 건물이 보존돼 있다. 이어서 비봉교회에 출석하던 여신도가 옥산면으로 출가해 시댁 식구를 전도해 예배 드리며 1903년 설립된 교회가 실업교회, 처가가 있던 비봉 마을을 왕래하다 신앙을 갖게 된 한학자 김원휘(1884~1950)씨가 1908년 읍내에 세운 것이 의성교회다. 이렇게 혼인을 통해, 가족끼리, 이웃끼리 전도하면서 의성군에 1910년 이전까지 세워진 교회만 26개, 1911~1925년 사이 설립된 교회도 16개에 이르러 100년 역사를 이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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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교회 전경. 오른쪽 건물은 1926년 개원해 내년 100주년이 되는 에덴유치원. 어린이들을 위해 마당에 차일을 쳐놓았다./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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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들은 지역 근대화와 민족 의식 함양에 앞장섰다. 비봉교회는 설립 직후 ‘계신학교’를 열어 근대 교육에 나섰고, 의성교회도 1926년 ‘숭신유치원(현 에덴유치원)’을 설립했다. 경북 지역 최초로 설립된 이 유치원은 지금도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3·1운동 때에도 교회가 앞장섰다. 1919년 3월 12일부터 3월 말까지 의성군 전체 만세운동 45회 중 32회를 교회가 주도했다는 연구가 있다.

    광복 후에도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의성교회(전용표 담임목사)의 경우, 1970년대까지 12개의 교회를 분립·개척했는데 “교회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천막 치고 1주일씩 지내며 농사일 돕고 기계 고쳐주고 저녁에 전도 집회를 열면 얼마 후 자발적으로 교회가 생기곤 했다”고 의성교회 신칠성 원로장로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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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 '주기철 목사 수난기념관'.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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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의성읍내에 문을 연 ‘주기철 목사 수난 기념관’은 의성 개신교계의 응집력을 보여주는 증거.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인물이다. 그러나 의성은 그의 고향(경남 창원)도, 순교지(평양)도 아니다. 인연은 1938년 의성경찰서에서 7개월 옥고를 치렀다는 것. 일제는 당시 의성교회 유재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농우회(農友會)’라는 단체를 탄압했는데,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였던 주기철 목사를 함께 체포했다. 이 단체와 연루됐다는 핑계였다. 의성 개신교계는 출향 목회자들과 함께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사업회(회장 오정호 목사)를 결성해 의성군의 지원을 받아 일제시대 의성경찰서 건물을 리모델링해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주기철 목사 수난 기념관 사무총장 추성환 목사는 “남한 내에 주기철 목사님과 관련된 유일한 수난 유적”이라며 “6월 일반 오픈 이후 주 목사님을 기리는 발길이 이어져 벌써 2000여 명이 방문했다”고 말했다. /의성=김한수 종교전문기자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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