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도 지지 않고 l 미야자와 겐지 시, 야마무라 코지 그림, 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2015) |
익히 알고 있듯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결합된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현대 그림책의 경향은 글의 의미에 대한 그림의 독립성에 더 주목하려고 한다. ‘시 그림책’은 이러한 독립성을 잘 볼 수 있는 분야이다. 그림책 작가는 이미 쓰인 시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자신만의 감성과 의미를 더하기 위해 고민한다.
일본의 국민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담은 그림책도 한 예이다. 마침 다른 작가 세명의 책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어 같은 시를 그림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지 세권의 그림책을 비교하는 일은 흥미롭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 /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1896년생인 작가가 90여년 전 생을 마감할 무렵에 쓴 이 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낭독될 만큼, 위로와 위기 극복의 시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그림책으로 만들 때 크게 갈리는 부분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그릴 것인가이다. 야마무라 코지의 그림책에서는 일본의 마을을 배경으로 화산 때문에 빚어지는 어려움이 없는지, 폭발할 기미가 없는지 가가호호 보살피는 화산 관리인이 나온다.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평생 이타적이었던 미야자와 겐지를 떠올리고 그렸음이 분명하다. 다른 그림책인 유노키 사미노의 책에서 ‘나’는 1930년대 일본의 촌부와 비슷한 모습이다. 천진한 모습이 옛 그림에서 등장하는 속세를 벗어난 도인을 연상시킨다. 한편, 곽수진이 그린 그림책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행마다 각각 다른 현대의 인물을 그려 넣는다. 한 사람이 아닌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들에서는 시의 리듬 역시 재구성된다. 시에서 행은 리듬을 창출하는 주요 형식이다. 원래 17행으로 구성된 시가 야마무라 코지의 그림책에서는 14펼침면으로 재배열된다. 다른 그림책들에서도 시의 행은 재배열되거나 혹은 충실히 따르는 등 작가의 선택 영역이 된다.
시각적 표현 역시 세권의 책이 매우 다르다. 야마무라 코지의 책은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이력을 보여주듯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한 역동적인 화면을 구사하는데, 구도 변화의 폭이 크다. 새와 곤충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부각되게 배치하여, 평온하지만 이와 달리 긴장감이 잠재되어 있는 화산 마을의 정서를 담았다. 다른 두권에서는, 행동하는 모습을 활기 있고 단순화된 표현으로 포착하거나, 배경을 우리의 일상으로 전환하여 친숙함을 주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였다.
지금까지 글에 대해 그림이 얼마나 독립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이 결합하는 묘미는, 둘의 공통성보다 오히려 차이성에 있다. 글과는 다르게 그림은 비순서적이며, 논리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렇게 특성이 다른 둘이 만나면, 그 사이에는 틈들이 생긴다. 독자들은 그 틈들을 나름대로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해석은 그림책의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해석의 융통성은 타 장르와 구별되는 그림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은숙 그림책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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