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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추사가 내디딘 ‘추상’으로의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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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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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이광이



    ‘추사체(秋史體)는 부생(復生)의 기괴고졸(奇怪古拙)한 아름다움의 결정이다.’



    전시기획자 이동국, 현직 경기도박물관장인 그의 글 첫 문장이다. 논문 형식 이 글의 제목은 ‘추사체와 큐비즘, 그리고 현대추상미술의 상관관계’, 부제로 ‘괴(怪)의 미학을 중심으로’가 붙어있다. 제목과 첫 문장이 두루 어렵다. 모르는 사람도 없고 통 아는 사람도 없다는 추사체, 그것이 쉽게 올 리 없다. 무엇을 얻을 때는 인내심이 필요한 법, 글을 말로 푸는 그의 얘기를 찬찬히 따라간다. 부생과 기괴와 고졸, 가다 보면 어느덧 알듯 말듯 한 것들이 ‘아하!’, 쑥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러면 보인다. 그때 보는 것은 처음 본 것과 다르다.



    ‘부생’의 부는 부활(復活)할 때 그 부다. 다시 사는 두번째 삶이다. 날이면 날마다 평범하게 이어지는 나날이 ‘생’이고, 죽을 고비를 한번 겪었다거나, 불교에서 ‘한 소식 했다’ 하듯이 한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대나무가 한 매듭을 닫고 새 절(節)을 열 듯이, 날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가 바뀌어서 어제와는 다른 새해를 맞이할 때 굳이 이름하자면 ‘부생’이다.



    이 관장은 추사가 생(生)-숙(熟)-부생(復生)의 단계를 지나갔다고 했다. 생은 24살 중국 연행 이전까지를, 숙은 이후 63살 제주 유배까지, 부생은 해배 이후 71살 생을 마치기까지, 세 매듭으로 나눴다.



    생은 학습하는 때다. 바둑에 ‘정석은 외운 뒤에 잊어버려라’는 말이 있다. 정석을 외우는 단계가 생이다. “조선 후기 왕희지는 ‘서성’(書聖), 즉 법이고 하늘이었어요. 붓을 든 모든 사람이 왕희지체를 썼죠. 그것을 첩학(帖學)이라 합니다. 왕희지 필체를 모본으로, 종이나 비단에 찍은 낱장을 묶은 책인 첩을 보고 그대로 익힙니다. 기교가 있고 화려하면서 부드럽고 세련된 선생이죠. 청년 추사도 그 필법을 익힙니다.”



    그러다가 1809년 24살,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 연행에 오른다. 가서 완원 주학년 옹방강 같은 중국 거장들을 만난다. 청나라 그들의 서체는 달랐다. 직강하는 선, 비상하는 삐침, 새의 꽁무니 같은 파임, 뭉툭한 갈고리, 직선인가 하면 곡선이고, 휘갈겨 놓은 초서, 원초적이며 힘차고 거칠었다. “그것을 비학(碑學)이라 합니다. 명대 유행했던 첩학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서예와 금석학의 한 조류지요. 비학은 말 그대로 비석이나 쇠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모본 삼아 한 지평을 개척한 것인데요, 추사는 여기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 거장들과 사제의 연을 맺고 시간을 거슬러 육조시대로, 멀리 진한의 예서에 이르기까지 비학을 파고듭니다.”



    그는 남방 첩학을 ‘붓의 글씨’, 북방 비학을 ‘칼의 글씨’라 했다. 비학을 이르는 말이 ‘고졸’(古拙)이다. 졸에는 옹졸하고 어리석고 서툴고 뒤떨어지고 쓸모없기까지 온갖 안 좋은 뜻이 다 들어있다. 하지만 졸하기 위해서는 딱 하나, 꾸민 데 없이 바탕이 질박해야 한다. 흔히 ‘고졸한 맛이 있다’하는 그 말은 서체에 각(刻)의 느낌이 나며 투박하면서도 옛 멋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능란한 ‘공’(工)보다 이를테면 ‘바보 노무현’처럼, ‘졸’(拙)이 어렵다.



    “추사는 55살 제주 유배를 가지요. 9년이 흐른 1848년 풀려납니다. 연행 떠나던 청년이 63살 노인이 되었지요. 이때까지 약 40년을 저는 ‘숙’(熟)이라 합니다. 어릴 때 배운 왕희지의 첩학, 청에서 익힌 금석문의 비학, 그것이 섞이면서 농익었던 시간입니다. 제자 이상적이 보내 준 서책들을 보면서 끝없이 공부하지요. 평생 벼루 10개가 구멍 나고 붓 1천자루가 몽당붓이 되었다는 추사의 회고는 ‘세한도’가 나온 이때를 말합니다. 보통 작가는 여기서 끝나지요.”



    이동국 관장, 1963년 경북 고령 태생이다. 아버지는 소농이었다. 고교 동아리에서 서예를 시작했다.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인데 발길은 서실로 간다. 대구 율림서도원에 다니며 이홍재 선생 밑에서 배웠다. 월사금이 없어 서실 청소를 도맡아 하면서 안진경 해서 교본 ‘쌍학명’(雙鶴銘)을 익혔다. 이어 고급 교본이라 할 북위 ‘장맹룡비(碑)’, 용문석굴 ‘조상기’(造像記)까지 7년을 공부했다.



    1989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큐레이터로 입사하여 전시 기획을 시작했다. 그리고 34년, 100회가 넘는 전시회를 주관하면서 독특한 자기 영역을 개척한다. 전시 작가 열전을 훑어보면 이광사 한호 오세창 이황 안중근 김정희 정약용 김구 여운형 김가진…, 전통과 민족, 독립과 통일이라는 말들이 관통한다. 2009년 ‘안중근 의거 순국 100주년 특별전’은 대성황을 이뤘다. 이듬해 8월29일이 망국 100년, ‘경술국치일’이다. ‘붓길, 역사의 길’ 특별전을 열어 안중근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를 나란히 걸었다. 주위에서 안 된다고 난리를 쳤지만 피아를 극명하게 대비시킨 이 전시회는 “전시 소개로는 최초로 지상파 3사 9시 뉴스를 동시에 타면서” 장안의 화제를 낳았고,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부생의 순간이라 할까요? 추사 63살 겨울, 바람 찬 초가 마당에 엎드려 해배 교지를 받은 그 날이 아닐까 합니다.”



    생과 숙을 지나 부생은 그냥 오지 않는다. 별안간 깨닫는 돈오(頓悟)를 헤르만 헤세는 ‘빛’으로 얘기했다. 칠흑 같은 암흑의 방에 있는 것과 뇌성벽력이 한번 친 뒤 암흑의 방에 있는 것, 둘은 다르다. 전자는 무명이라 길을 모르되 후자는 벽력의 빛이 다녀갔다. 빛을 못 본 하나는 어둠을 헤매고, 빛을 본 하나는 문을 향해 걸어 나온다. 언제 유배에서 벗어날까, 생각에 갇혀 있다가 둑이 터지듯이 툭 터져버리는 순간을 추사는 그 겨울에 맞이하지 않았을까, 이 관장의 얘기는 그 말이다.



    여기서부터 부생이다.



    ‘나라고 해도 좋고/ 나 아니라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고/ 나 아니라 해도 나다/ 그 시비 속에 나는 없다/ 제석천 구슬 중중 무진하거늘/ 여의주 한 상(相)에 집착하는 자 누구인가, 하하’



    추사가 자화상의 자기 모습을 보면서 쓴 시다. 제석천 그물코에 박힌 수많은 구슬이 서로의 모습을 비치며 무한 반사한다. 거기 한 구슬에 내 모습이 비쳤다고 해서 그것이 나인가, 그런 말이다. 끝에 ‘과천 노인 쓰다’가 붙어,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던 67살 무렵으로 본다. 선승의 오도송 같은 이런 시는 ‘빛’이 다녀가지 않고는 쓸 수 없다.



    “추사 문집에 몸종과 얘기를 나누는 대목이 나옵니다. 추사가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 내가 너고 네가 나다’ 하니, 몸종이 ‘대감님과 제가 어떻게 같습니까, 지체가 하늘과 땅인데요’ 한다. 추사가 천지가 다르지 않듯 너와 나도 둘이 아니라면서 마지막 그림 ‘불이선란’(不二禪蘭)을 그려주지요. 그러고는 마지막 글씨 봉은사 ‘판전(板殿)’을 쓰고 타계하는데 이 8년이 부생의 시간입니다.”



    만년의 걸작들이 이때 나온다. ‘학위유종’(學位有終) ‘계산무진’(谿山無盡) 저렇게 못 쓴 글씨도 있나 싶고, 서예인지 그림인지 모호한 것들, 이 관장은 그것을 ‘괴’(怪)라고 했다.



    “미추(美醜)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서양 현대 미술은 시작합니다. 폴 세잔이 인상주의에서 큐비즘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고 첫발을 내딛지요. 동양 현대 미학은 정형의 틀을 깨는 데서 출발합니다. 추사는 낡은 틀을 깨고 정형과 비정형을 자유롭게 넘나들지요. 정형에 익숙한 사람에게 괴이하게 보이는 ‘괴의 미학’입니다. 우리는 추사에 이르러 비로소 추상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한국 현대미술 100년, 이응로의 서체추상, 윤형근의 획면추상, 곽인식의 색점추상, 그리고 양수아의 비구상은 그 땅 위에 핀 꽃이지요.”



    다시 보니 ‘학위유종’과 ‘계산무진’이 달리 보이기는 하나, 부생과 기괴와 고졸을 잘 지나 ‘추사체’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서양 추상의 아버지는 세잔이고, 우리 추상의 할아비는 김정희로구나, 그런 생각은 든다. 그는 푸른색에서 쪽빛으로 나아가는 것, 예술이란 시대의 담을 허물고 전인미답의 황무지로 나아가는 일이라 본질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전위에 추사가 있다고 했다.



    이 관장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동서 미학 비교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여러편 썼다. 2014년부터 경기도박물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광복 80주년 안중근과 오세창, 우리가 쉬 잊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2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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