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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복숭아 키우며 고향 영천을 ‘인문학 도시’로 만드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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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이중기 시인이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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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로 등단해 그간 모두 9권의 시집을 낸 이중기(68) 시인은 고향 경북 영천에서 87년부터 농부로 산다. 처음엔 사과나무를 키우다 1998년부터는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다. 3천평 과수원 일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그는 한해 70일쯤은 빼먹곤 했던 영천고 졸업장을 쥔 뒤 부산과 서울 등 타지를 떠돌다 87년 “술병”이 드는 바람에 귀향했다. 부친이 정성껏 채취한 인진쑥이 효험을 봐 병을 이겨내고 88년부터 영천농우회 활동을 했다. 1992년엔 농우회를 나와 영천농민회를 새로 만들었다. 농민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1998년부터 5년 동안 영천농민회장을 하며 한-칠레,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시위 등을 이끌었다. 이 시절 많을 때는 매년 60차례 ‘상경 투쟁’을 했다.



    1995년 시위 도중 그는 한 어르신과 만나게 된다. 이후 그의 삶은 큰 변화를 맞는다. 대구 외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다는 영천의 10월항쟁 역사를 다룬 3부작 시집 ‘시월’(2014), ‘영천아리랑’(2016), ‘어처구니는 나무로 만든다’(2018)를 펴내 “이 장시집(시월)을 건지게 된 것은 우리 문학사의 한 행운”(이하석 시인), “‘영천아리랑’은 영천문학의 기념비다”(백무산 시인)와 같은 평을 만났다. 2022년에는 영천 10월항쟁 목격자의 유일한 기록인 루이 델랑드(1895~1972) 프랑스 외방전교회 선교사의 기록을 토대로 시집 ‘정녀들이 밤에 경찰 수의를 지었다’를 펴냈다.



    지난 12일 영천시 백신애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이 시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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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기 시인의 영천 10월항쟁 시집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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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요즘 내달 18~19일 대구경북작가회의 주최로 영천에서 열리는 10월문학제 준비에 바쁘다. 2013년 시작한 이 문학제가 대구 외 지역에서 열리기는 처음이다. “저를 포함해 영천의 여성 시인 3명(성희·박미경·이정연)이 함께 준비하고 있어요. 제주작가회의 회원 30분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이 오십니다.”



    행사는 영천 10월항쟁의 주요 장소를 둘러보고 자양면 보현자연수련관에서 영천 10월항쟁과 제주4·3항쟁,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 관련자들이 희생당한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답사지 중에는 10월항쟁 당시 방화 피해를 본 영천 대지주 이인석 집터도 있다. “삼만석 지주로 불린 이인석은 가혹하게 소작농을 착취한다고 원성이 컸어요. 항쟁이 터진 뒤 그 집이 피해를 많이 봤죠. 천평도 넘은 터에 있던 대저택이 그때 불탔어요. 다른 대지주 정도영의 집도 전소했어요. 지금은 솟을대문만 있는데요. 그 문을 보면 본채의 웅장한 규모가 짐작됩니다. 정도영은 해방정국의 우익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천군지부장이었죠. 한국전쟁 초기에 민간인 300명이 총살당해 ‘아작골’로도 불리는 산골짜기를 바라보는 곳에 세운 ‘영천민간인희생자 위령탑’도 둘러보려고 합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강압적인 식량 공출이 도화선이 되어 터진 10월항쟁은 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해 그해 12월 중순까지 남한 73개 시군에서 일어났다. 영천 항쟁이 특히 격렬했다. ‘영천은 (10월항쟁에서) 인구 대비 참가율이 가장 높고 전체 읍과 면에서 빠짐없이 항쟁이 일어났다.’(김상숙 저 ‘10월항쟁’)



    영천 항쟁 첫날 이태수 군수는 인민위원회 농민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경찰 사망자도 15명이나 나왔다. 이 시인은 “대구 10월항쟁이 노동자가 총에 맞아 죽으면서 시위가 격렬해지는 등 우발적인 측면이 컸다면 영천은 다분히 계획적이었다”면서 두 가지를 말했다.



    “우선 대지주와 군수의 농민 착취가 가혹했어요. 미군정은 46년 봄에 일제도 안 한 하곡(보리) 공출을 했는데요. 이때 실적이 영천이 경북 1위였고 경북은 전국 1위였어요. 그만큼 공출이 가혹했죠. 당시 군 직원과 경찰은 마을을 돌며 공출을 하지 않은 집이 발견되면 모두 모이라고 해 두 명씩 마주 보고 서로 귀를 잡고 뺨을 때리도록 했죠. 그래서 삼촌이 조카를 때리고 자식이 아버지를 때리는 괴상망측한 풍경도 벌어졌답니다.”



    다른 하나는 항쟁 주체 역량이었단다. “당시 영천에는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결집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었어요.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백기호, 황보집, 정시명, 임장춘 등이 그 핵심이었죠. 루이 델랑드 신부가 항쟁 직전에 ‘작은 동네 영천이 빨갱이 동네로 소문났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죠.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에선 항쟁 이전에 영천 경찰서장 체포와 군수 처단 지시를 군당에 내렸어요. 대구에서 항쟁 세력들이 내려오고 불과 몇 시간 지난 3일 새벽 1시에 수천명이 영천군청을 에워쌀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고교 나와 타지 떠돌다 87년 귀향
    농사 지으며 88년부터 농민운동
    95년에 영천 10월항쟁사 w전해듣고
    막걸리 세례 받아가며 증언 채록
    ‘시월’ 등 10월항쟁 3부작 시집 내고
    고향 작가 백신애·하근찬 전집도





    “시에서 안 하니 우리라도 해야죠”





    그는 2008년부터 2년 이상 각 면을 돌며 항쟁의 기억을 채록했다. 이 과정에서 10여 차례 막걸리나 물 세례도 받았다.



    “해방정국을 들쑤신 빨갱이 미친 자식들처럼 찾아다닌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막걸리를 퍼붓던 분들도 다시 찾아가면 절반 정도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철저히 제3자의 시각으로요. 항쟁에 가담해 피해를 본 당사자나 그 가족은 가타부타 말을 안 하고 표시도 안 합니다. 철저히 침묵하죠. 이 지역은 10월항쟁에서 보도연맹 학살,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트라우마가 너무 강해요. 무고하게 좌익으로 몰려 희생을 당한 분들 자녀 중에도 빨갱이로 소문날까 봐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는 영천 인구 15만5천명 중 6만명 이상이 참여한 영천 10월항쟁을 95년까지 알지 못했단다. “10월폭동 소리만 어릴 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죠. 10월항쟁이 영천에서 있었다는 건 아예 알지 못했고요.”



    95년 어느 날 영천군청 앞 농민집회에서 그가 김영삼 정부 농정을 성토하는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자 한 어르신이 불렀다. 어르신은 시인에게 “김영삼 정권을 절대 믿지 말라. 그 뒤에 나쁜 세력이 있다”고 한 뒤 영천 10월항쟁 이야기를 들려줬다. 시인은 이후로도 어르신을 몇 차례 만나 항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10여년도 더 흘러 시인은 고향에서 일어난 격렬한 민중항쟁의 실체를 매우 상세히 드러내는, 역사적 통찰력 가득한 시를 써내려갔다. 이전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영천 항쟁의 희생자들이 함축적인 언어로 쌓은 그의 시편에서 생생한 역사 인물로 되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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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기 시인이 백신애 작가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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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제주4·3과 영천10월은 같은 말이라고도 했다. “영천에서 서북청년단(서청)은 벼락 치듯 행동했다고 해서 ‘벼락부대’라고 불렸어요. 서청이 ‘살인면허’를 갖고 가장 먼저 온 곳이 영천입니다. 그들은 주민들을 끌고 가 감금한 뒤 금품을 받고 풀어주기도 했죠. 서청은 영천에서 기술을 연마해 제주에서 맘껏 휘둘렀어요.”



    10월항쟁 시집 3부작으로 “영천의 현대사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는 그에게 영천항쟁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한국전쟁 당시 영천경찰서가 작성한 월북자 명단 303명이 국가기록원에 있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았어요. 이 명단이 나오면 10월항쟁 연구의 어떤 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그 명단이 학살 희생자들이라고 봐요. 명단을 만들 무렵 영천은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라 경찰이 월북자를 조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거든요.”



    ‘농민운동가’ 이중기와 10월항쟁 시집 사이에 역시 영천이 고향인 소설가 백신애(1908~39)가 있다. 그는 2005년부터 약 10년 동안 복숭아 농사일이 한가해지는 9월만 되면 서울에서 한달씩 머물며 국립중앙도서관 백신애 자료를 훑었다. 그렇게 2015년 ‘원본 백신애전집’, 2021년 ‘현대어 백신애 소설 전집’을 엮었다. 백신애를 다룬 기존 책에 오류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연구자들에게 제대로 된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선 게 직접 발굴한 작품 24편이 추가된 전집 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2007년엔 백신애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해마다 백신애문학제를 열고 있다.



    일제강점기 영천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백신애는 시대가 여성에게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려 맹렬히 노력한 여성이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19살에 ‘시베리아 방랑’을 시도했고 서울에서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경성여자청년동맹 활동을, 영천에서는 신간회 조직 등 지역운동을 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뽑혀 한국 여성 1호 신춘문예 등단 작가라는 영예를 쓴 뒤에도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도일해 주인공으로 ‘모던 마담’이란 영화를 찍었다. 불과 31살에 췌장암의 극한 고통 속에 죽은 백신애는 사후 친정 가족묘지에서 파묘됐다. 출가외인이 묻혀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무당의 이야기를 듣고 친정 후손이 묘를 파헤쳐 유골을 산천에 뿌렸단다.



    “고교 시절에 백신애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아 백신애 홍보대사를 자처했어요. 만나는 친구마다 꼭 읽어보라고 했죠. 작품도 좋지만 그의 삶에 더 끌렸어요. 백신애는 그 시절 여성으로서 대단한 삶을 살았어요.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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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인 등이 운영 중인 영천문학자료실의 희귀 자료들. 강성만 선임기자


    4년 전부터는 역시 영천 소설가인 하근찬(1931~2007) 전집 출간에 힘을 쏟고 있다. 중앙대 오창은 교수와 이정숙 문학평론가 등과 편집위원회도 꾸렸다. 내후년 23권 완간 목표로 현재 14권을 냈다.



    “2011년 서울에서 대구경북 출신 문인들이 내려와 하근찬 작가 세미나를 하고 갔어요. 뒤로 뭔가 할 것 같더니 아무것도 안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우연한 기회에 오창은 평론가에게 전집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그는 “하근찬 하면 1957년 등단작인 ‘수난이대’ 작가로만 알려졌지만 하근찬 문학의 진짜 매력은 60년대에 발표한 단편의 미학”이라고 했다. “60년대 한국 단편 중 하근찬 작품이 백미입니다.”



    그가 영천 출신 여성 시인 셋(성희·박미경·이정연)과 운영 중인 영천문학자료실에는 백신애·하근찬 희귀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말에 그는 “영천시가 하지 않으니 우리라도 해야죠”라고 답했다.



    “영천을 인문학의 도시로 만들고 있는 사람.” ‘사람의 문학’ 발행인 정대호 시인이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태어난 곳이자 39년째 농부로 사는 영천은 시인에게 어떤 곳일까? “영천은 46년 7월 빨갱이 동네로 소문난 작은 읍내로 정말 좌익이 많았어요. 근데 제가 철들고 보니 반공투사들밖에 없었죠. 영천에 정착하고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되게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농민회가 좀 과격했던 이유도 있었죠. 그래도 제가 영천고 나왔다고 학교 선배들은 눈을 감아주더군요. 그때는 우익들 소굴 같아 영천을 되게 싫어했어요. 걸핏하면 빨갱이, 종북 좌파라고 비난했죠.”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우익들 하고도 잘 지낸다.” 20여년은 그가 10월항쟁과 백신애, 하근찬에 몰입한 시기였다.



    “옛날에는 우익들 하고 술 한잔 하면 험악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공존해서 살 수밖에요. 그래도 40대 우익을 보면 가끔 화날 때가 있어요.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심한 말을 하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요즘은 선동가들이 너무 많아요. 일부 좌파도 이재명 대통령을 너무 띄우는데 맘에 안 듭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닮고 싶은 시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옛날부터 내가 쓰고 싶은대로 썼습니다. 이른바 중앙 문단과 인연을 맺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거의 안하무인 격이었죠.”



    그는 농민회 활동을 시작할 무렵, 10대와 20대 때 쓴 시를 모두 불태웠단다. 모더니즘 계열 시였다.



    시는 도대체 뭐냐는 물음에 그의 답은 이렇다.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제가 유인물을 많이 만들었어요. 나중에 보니 이게 바로 내 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내 시는 격문이었다고 했어요. 나는 격문 쓰는 사람이라고요. 내가 쓴 시는 메시지입니다. 농민회 시절 시는 농촌에 대한 메시지였고, 10월항쟁 시는 항쟁과 영천에 대한 메시지였죠. 제가 쓴 10월항쟁 시는 모두 영천을 살아낸 영천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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