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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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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수의 오마이갓] “빈소·조의금·조화 없이 예배는 한 번만”...어느 목회자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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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하 목사, 수술 앞두고 핸드폰 메모장에 유언

    간소한 장례...예배 순서·찬송가까지 당부

    조선일보

    고 신경하 목사는 암수술을 앞두고 미리 정리한 유언을 통해 간소한 장례를 당부해 교계에 감동을 전하고 있다. 사진은 신 목사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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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두경부암으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을 준비하는 밤이다. 수술 과정에서 대략 10시간 가까이 마취 상태를 지속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소견을 들었다. 만일의 예측 못한 생사의 갈림길이 될지 모르기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와 혹 나의 장례가 이루어지는 상황일 때 나의 마음을 문자의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죽음은 임박한 종말로 생각하며 준비해 오고 있었다.”

    한 목회자가 암 수술을 앞두고 혹시 모를 자신의 장례를 꼼꼼하게 정리해 당부한 유언을 남겨 개신교계에 잔잔한 감동을 안기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감독회장을 지낸 신경하 목사. 신 목사님은 수술 후 경과가 좋았으나 갑자기 증세가 악화돼 지난 9월 22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신 목사의 장례 예배는 그가 담임목사를 지낸 아현감리교회에서 9월 25일 열렸습니다.

    그런데 신 목사의 장례에는 빈소도, 부의금과 조화(弔花)도 없었고 예배는 장례 예배 단 한 차례였습니다. 모두 그가 생전에 작성한 유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조선일보

    고 신경하 목사의 장례가 9월 25일 서울 아현감리교회에서 엄수됐다. /송병구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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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 말씀드린 유언은 신 목사가 지난 9월 13일 밤에 핸드폰 메모장에 남긴 일기입니다. 신 목사님은 평소 핸드폰 메모장에 일기를 남기곤 했답니다. 그날은 입원과 수술을 앞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심경을 적고 준비할 사항을 적었습니다. 이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2019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했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2022년 시신을 기증했다. 010-xxxx-xxxx으로 연락해 안내받기 바란다. 나의 시신은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안치하고 빈소는 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배는 장례식 예배로 아현교회에서 한 번만 드리도록 하자. 조의금이나 조화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경하 목사님은 1941년 강화도에서 출생했습니다.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하고 대광감리교회, 도봉감리교회, 우이감리교회를 거쳐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아현감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습니다. 아현감리교회 담임목사 시절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즉 감리교 교단장으로 선출돼 4년간 재임했지요.

    저는 감독회장 시절 신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신 목사님은 소탈하고 유머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꼼꼼하고 강단이 있는 분이기도 했지요. 담임목사 시절에도, 감독회장 시절에도 ‘집 한 칸 없는 목사’였지요. 그는 “담임목사와 감독회장을 맡고 있을 때는 교회와 교단에서 사택을 마련해줘서 살았다”며 “담임목사는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면 먼저 헌금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따로 집이나 땅을 마련할 생각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감독회장 4년 임기를 마친 신 목사님은 고향 강화도로 훌쩍 낙향하시더군요. 그 뒤로는 직접 뵐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페이스북 활동을 열심히 하셔서 이런저런 작물 농사짓는 모습과 과거 인연을 맺었던 목회자와 단체나 시설을 방문하는 모습을 올렸지요. 참 편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신 목사님이 별세하신 사실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감리교 교단장을 지낸 분의 부음을 언론이 모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개 해당 교단에서 기본적으로 부음과 장례 절차 등을 발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 목사님의 경우는 저런 유언이 있었고, 빈소조차 마련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부음도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평신도의 경우에도 크리스천들은 장례 때 여러 번 예배를 드리곤 합니다. 임종 예배, 입관 예배, 발인(장례) 예배, 하관 예배, 위로 예배 등이지요. 이렇게 예배가 여러 차례 있다 보니 담임목사 혼자 다 맡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규모가 있는 교회는 담임목사와 교구 담당 목회자가 이들 예배 순서를 나누어 맡아 집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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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신경하 목사의 장례예배(천국환송예식) 순서지 표지(왼쪽)와 예식 순서. 신 목사는 이 예배의 순서를 맡아줄 사람까지 미리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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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신 목사님은 본인의 경우, ‘장례 예배 한 번만’으로 간소화했습니다. 조문하실 분들은 장례 예배 한 번에 모두 모이도록 한 것이지요. 조의금이나 조화는 사양하고요. 그뿐 아니라 예배 순서를 맡을 분들과 찬송가까지 모두 당부해 두었다고 합니다.

    장례위원장 김종훈 감독, 설교는 감독회장, 추모사는 이원재·송병구 목사를 비롯해 ‘기도’ ‘성경 봉독’ ‘광고’ ‘가족 대표 인사’ ‘사회’ ‘축도’ 그리고 ‘장례준비위원’ 명단까지 모두 맡아줄 사람을 적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신경하 목사가 즐겨 부른 찬송:400장, 570장, 485장’ ‘특별 환송 찬양: 옛 아현교회 추수감사절에 부르던 교회 직원 전체의 찬양(녹음테이프 활용)’ 그대로 인쇄하면 바로 장례 예배 순서지가 될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장례 예배 마친 후에는 아현교회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정성껏 대접하도록’ ‘아현교회에 감사 헌금’ ‘순서 맡은 분들에 대한 사례 준비’까지 꼼꼼히 다 적었다고 합니다.

    신경하 목사님은 “이렇듯 두서 없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나니 14일 밤 12시(0시) 5분이 되었다”라며 “신 목사가 좋아하는 성경 말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마태 5:9)”라고 적었습니다. 아마도 순서를 맡아줄 한 사람 한 사람, 좋아하는 찬송과 성경 말씀 등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겠지요. 핸드폰에 한 글자씩 입력하는 그 모습이 상상이 갑니다. 얼굴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신 감독님의 20년 비서’를 자처하는 송병구 색동교회 목사는 “빈소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주변에서 원망을 많이 들었다”면서도 “신 감독님이 모두 정해두셔서 장례 예배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따로 할 일이 없을 정도였고 덕분에 모두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환송해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신 목사님은 또 유언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죽음과 가까이 지낸 나의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오늘을 충실히 살고 매 순간을 값지게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게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오늘의 삶을 더 충실히 보람 있게 살기 위한 다짐이자 매 순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온 나의 85년의 세월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은총의 세월이었다.”

    신 목사님은 2008년 감리교 감독회장에서 퇴임하면서 ‘매일 아침 1분’이란 책을 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기에 좋은 의미 있는 짧은 글 300여 편을 모은 책이었습니다. “사람을 선택하고 판단하는 세 가지 도구가 있다. 손가락과 눈, 가슴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손가락 끝으로 판단한다” 같은 문장들입니다. 이 책에서 신 목사님은 행복에 대해 “가장 큰 (행복의) 비결은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은퇴하는 심경에 대해 “훌륭한 목사로는 모자랐지만, 행복한 목사가 되는 데는 과분함을 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신 목사님은 떠날 때까지 행복한 목회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신 목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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