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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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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없는 섬엔 못 살아” 103년 전 한센인들 호소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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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 선교 140주년…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 [14] 소록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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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중앙교회. 소록도의 한센인들이 중증 장애를 무릅쓰고 직접 자재를 나르고 공사를 해 완공해 1966년 헌당한 예배당이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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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 전 중증 환자들이 직접 지은 교회입니다. 잘 지었지요? 소록도 시설은 대부분 한센인들이 손수 만든 것입니다.”

    지난 1일 전남 고흥군 소록도. 겉면에 흰색 타일을 붙인 예배당이 맑은 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많을 땐 3000명이 앉았다는 규모의 소록도중앙교회이다. 보기엔 아름다운 전원 예배당이지만 소록도 교회들엔 한센인들의 눈물과 피땀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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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중앙교회 기초 공사 모습. 1963년 착공돼 1964년 완공돼 1966년 소록도의 다른 일곱 교회와 함께 헌당식을 가졌다. /소록도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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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중앙교회의 1966년 헌당식 기념 사진. /소록도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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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교회를 포함해 소록도에 교회 8곳이 지어진 것은 1963~64년. 당시는 ‘오마도 간척 사업’이 한창이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환자는 모두 간척 사업에 동원돼 교회 건축엔 중증 환자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1922년 소록도에 처음 교회가 들어선 후로 40년간 예배당으로 써오던 치료소 대신 ‘진짜 예배당’을 짓자는 데 뜻을 모았다. 당시 김두영 담임목사의 기록에 따르면 몸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왔고, 눈먼 사람들이 흙을 퍼 나르고, 절름발이가 돌을 날랐고, 한 손 없는 사람들이 모래 나르고, 블록 찍고, 담을 쌓았다고 한다. 머리카락 팔고, 발가락으로 바늘 잡고 수를 놓아 판 돈까지 헌금했다. 그렇게 2~3년 만에 교회 8곳 모두 건축비를 갚고 1966년 11월 23·24일 이틀에 걸쳐 헌당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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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교회 초기 교인들. /소록도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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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교회 100년사는 대하(大河) 드라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소록도에 한센인 격리 시설인 자혜의원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전국 한센인들이 소록도로 보내졌다. 1922년 어느 날 한센인 3명이 섬을 탈출했다가 잡혔다. 일본인 하나이(花井) 원장의 심문에서 그들이 밝힌 탈출 이유가 뜻밖이었다.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이 병원에서는 못 살겠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교회가 없어서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이 원장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나머지 환자들 의향도 묻고 다른 요양소 현황을 파악한 후 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해 일본인 목회자를 초청했다. 1922년 10월 2일 일본 성결교 다나카(田中) 목사가 소록도에 와 전도 집회를 연 것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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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 고이데 토모하루 목사(왼쪽)와 그의 가족 사진. 고이데 목사는 일본 성결교 목사로 1927~1937년 소록도교회 목사로 사역하며 교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소록도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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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부터 각지에서 한센인 구호·요양소를 운영했다. 덕분에 탈출 사건에서 보듯 소록도로 온 환자 중에는 이미 개신교 세례를 받은 이가 많았다. 1927년 성결교 고이데(小出) 목사와 1932년 감리교 야다(矢田) 목사가 차례로 부임해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면서 소록도의 개신교세는 급격히 커졌다. 고이데 목사는 일본 귀국 후에도 천황을 신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다 투옥돼 패전 후 간수들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증언(김두영 목사)이 있을 정도로 신앙에 투철했다.

    1920~30년대 동서남북을 비롯한 여섯 마을마다 교회가 생겼고, 광복 후에도 장안리교회(1946년), 직원교회(1951년)가 설립됐다. 목사는 이 교회들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했다. 환자 가운데는 ‘인텔리’도 많았다. 환자들은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이 발행하던 ‘성서조선’에 논설과 편지 등 글을 80여 편 실었다. 윤일심 환자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도 조그마한 질병에 못 이겨 한숨과 눈물 짓는 자가 있으면 절대 마병과 싸우는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에 귀 기울여 들어보소서”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한센인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발병했을 때, 사망 후 검시(시신 해부) 때, 화장(火葬)할 때다. 한센인은 그런 설움과 한을 신앙에 의지해 버텼다. 광복 후 한때 소록도 전체 인구 6000여 명 가운데 5000여 명이 개신교 교인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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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6월 10일 장로를 선출한 후 기념 촬영한 모습.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정복 담임목사, 오른쪽 다섯번째는 손양원 목사. /소록도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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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없이 광복을 맞은 교회 지도자들은 1946년 인근 고흥읍교회 김정복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부터 소록도교회는 장로교 교회가 됐다. 6·25 당시 칠순이었던 김 목사는 피란 권유에도 양들을 지키다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희생당했다.

    1962년부터 31년간 담임목사를 지낸 김두영 목사 시절은 소록도교회의 전성기였다. 성전 8곳을 완공했을 뿐 아니라 축산 조합과 ‘사랑의 금고’를 설립해 자립 기반을 마련했다. 교회마다 교인으로 넘쳐났다. 지금도 중앙교회 강대상은 어른 키보다 높이 설치돼 있다. 예배당 2층의 교인까지 잘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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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남성교회. 1963년 건축돼 주민과 신도의 감소로 2018년 폐쇄된 이 교회 건물은 소록도교회 100주년 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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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최근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는 소록도 역시 피할 수 없었다. 현재 주민은 320여 명, 교인은 200여 명이며 평균 연령은 80세. 교회 8곳 중 중앙·신성·동성교회만 남았다. 신앙은 굳건하다. 주일 예배(오전 8시, 오후 1시) 외에도 새벽 기도회(4시), 수요 예배(오후 1시)는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박형석 장로는 “지난 6월 25일 이재명 대통령의 소록도 방문 때 수요 예배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록도교회는 폐쇄된 남성교회 건물을 개조해 내년에 ‘100주년 기념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윤성구 담임목사는 “소록도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신앙을 지켜왔는지 제대로 알리고 싶다”며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다. /소록도(고흥)=김한수 종교전문기자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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