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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이슈 이태원 참사

    “이태원 참사, 슬픔 딛고 생명 존중 사회로 나아가는 빛과 희망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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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이태원 참사 유가족 이상은씨의 부모(이성환 강선이)가 1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정원에서 인터뷰 전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우종 선임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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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0월29일 159명의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가 어느덧 3주기를 맞았다. 올해는 큰 변화가 있다. ‘참사 지우기’에만 혈안이 됐던 윤석열 정권이 무너지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진상 규명을 요구해 온 유족과 시민들의 기대가 그만큼 크다. 의미 있는 소식도 있다. 지난 23일 국무조정실은 윤석열 정권의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참사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임을 시사하는 합동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참사 당일 경찰이 대통령실 주변을 집중 경비하느라 이태원 현장에 단 한 명의 경비 인력도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2020년부터 세웠던 ‘핼러윈데이 인파관리 경비계획’을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한 2022년에는 수립하지 않았다. 이태원 일대에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대통령실 경비에만 집중했음을 보여준다.



    정부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와 함께 추모 행사를 주최한 것도 과거와 다른 점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25일 시민추모제에 참석해 “진상 규명과 책임에 상응하는 조치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비로소 유족들의 소망이 이뤄지게 되는 걸까. 스물다섯 외동딸 이상은씨를 떠나보낸 이성환·강선이 부부를 만나 3주기를 맞는 소감과 바람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16일 한겨레 사옥에서 진행했고, 시민추모제 행사가 끝난 뒤 26일 추가 취재했다.)





    - 지난 25일 외국인 희생자 유족들이 처음으로 이태원 참사 현장을 방문했다(외국인 희생자 26명 중 20명의 가족 45명이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방한했다).



    “그렇다. 자신의 아이들이 한국을 좋아해서 널리 알리고 싶어 했는데 죽음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참사 현장에서 통곡하는 한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에서 어떤 대화도 없었고,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3년간 고립되어 슬픔 속에 지내다가 이제야 같은 아픔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서 큰 위로가 됐다고 하더라.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 유족들이 정부를 상대로 힘겹게 싸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유족들한테 ‘끝까지 싸워줘서 고맙다’고 했다. 참사의 원인을 찾아내고 책임자를 꼭 처벌받게 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했다.”



    - 어느덧 참사 3주기를 맞았다.



    “세월이 금방 지나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달이 넘도록 기사도 보지 않았다. 마음을 다스리기가 그만큼 힘들었다. 아이를 잃은 것도 슬펐지만, 2차 가해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주위 분들이 ‘인터넷 댓글을 보지 말라’고 했을 때는 별 신경도 안 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통해 다른 유족들을 만났을 때 모욕적인 댓글 내용을 알게 됐다. ‘서양 귀신 놀이에 뭐 하러 놀러 가서 죽었나’ 같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난무했다. 누구든지 일하고, 휴식하고, 놀 권리가 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행위다. 왜 희생자들에게 참사의 책임을 돌리는가.”



    “유족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과 명예 회복이다. 제일 먼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 왜 참사 예방을 하지 못했는지, 왜 구조를 제대로 못 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 두 번째는 ‘지연된 정의’를 하루빨리 해소해야 한다. 책임자 처벌을 제대로 해야 한다. 검찰은 대통령실과 행정안전부, 그리고 경찰청 등 ‘윗선’은 손도 못 대고 하급자만 기소했다. 그마저도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혐의로 기소된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심에서 무죄,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은 금고 3년이 선고됐다. 이 전 서장은 일찌감치 보석으로 풀려났다. 항소심 재판은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무기한 중단됐다. 박 구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된 날 유족들은 절규했다. 유족들은 법원을 빠져나가는 박 구청장 차 앞을 막으려고 차도에 누웠다. 통곡하는 유족들과 이를 제지하는 경찰이 엉키며 법원은 아수라장이 됐다. 김 전 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된 날에는 강씨 부부도 무너졌다. 인파 관리 실패에 대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고위 공직자에게 당연히 유죄가 선고될 줄 알았다. 강씨는 “윤 정권에 이어 사법부마저도 이렇게 덮고 가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참사 원인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실 이전이다. 유족들이 첫 번째로 요구한 게 윤석열의 사과였던 이유다.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경찰의 경비 업무가 늘어났다. 참사 당일 집회에 대응한답시고 경비 인력을 대통령실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당시 마약 수사팀이 현장에 투입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마약사범 잡겠다고 경찰이 사복을 입고 잠입 수사를 하는데 정복 입은 경비 인력을 배치할 수 있었겠나.”



    (경찰은 당시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대와 용산·동작·강북·광진경찰서 소속 10개 팀 52명의 형사 인력을 이태원에 배치했지만, 단속 실적은 0건이었다. 이들은 이태원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 대형 참사가 벌어진 사실을 처음엔 알지 못했다. 참사를 인지한 것은 당일 오후 10시 44분으로, 사고 발생 29분 만이었다.)



    -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국회로 달려갔다고 들었다.



    “그날 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는 걸 생중계로 보고 처음에는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에스엔에스(SNS)에서 누군가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국회로 모여달라고 했다는 글을 봤다. 유튜브를 찾아보니까 진짜 이 대표가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국회로 모여주십시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국회 앞으로 갔다. 사는 동네가 여의도와 가까워서 금방 도착했다.”



    - 유족 단톡방에서 모이자고 했나?



    “아니다. 오히려 유족들이 모인 단톡방에서는 외출을 자제하자는 분위기였다. 추모 공간인 ‘별들의 집’ 지킴이 활동 순번인 가족한테 ‘혹시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오지 마시라’는 글도 올라왔다. 왜냐하면 우리 유족들은 계엄군의 유력한 ‘수거 대상’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가장 지우고 싶은 것이 바로 이태원 참사였을 테니까. 그가 내란을 일으킨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 만약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걱정보다는 ‘계엄이 성공해서 우리 부부가 계엄군한테 체포되면 유가족협의회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탄압의 빌미가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별걱정 다한다’고 웃을지 모르겠지만(웃음). 계엄이 해제되고 나서 매주 윤석열 탄핵 집회가 열렸잖나. 유족들도 매주 집회 현장에 부스를 차렸는데, 많은 시민들이 우리의 안전을 걱정해 주셔서 깜짝 놀랐다. 준비한 리본과 초코파이 5만 개가 다 동이 난 날도 있었다. 시민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집회 현장에서 ‘힘내세요’라는 따뜻한 말을 들으니까 정말 힘이 나더라. 후원금 내시는 분도 계시고. 돌이켜 보면 내란 때부터 윤석열 탄핵까지 하나의 큰 서사였다는 느낌이 든다.”



    - 지난 5월 교황 레오 14세를 직접 만났다고?



    “그렇다. 세월호 유족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23년 참사 1주기 추모제를 앞두고 세월호 유족분들과 만났을 때 우리 유족 중 한 분이 그 분들에게 어떻게 합창단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아이들의 얘기로 연극을 공연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우리 아이의 꿈이 배우였어요’ ‘우리 애는 가수였죠’였다. 그 말을 듣고 뭔가 크게 깨달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꿈을 대신 이뤄주려고 노래 연습도 하고 연극도 하신 거였다. 나도 딸 아이의 꿈이 뭐였는지 머리에 떠올려 봤다. 상은이는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시험에 합격한 뒤 발레·독서모임 등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고 있었다. 성당 교리 수업을 거쳐 세례성사를 받겠다는 목표도 들어 있었다. 교리 수업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딸 대신 내가 교리 수업을 받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무신론자라서 처음엔 고민이 됐고, 또 ‘신이 있다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하는 원망도 있었지만, 그래도 종교를 믿으면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딸이 다니던 성당을 간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교 신자였던 상은이 아빠도 교리 수업을 받겠다고 해서 같이 성당에 나가게 됐다.”



    “올해가 우리 부부 결혼 30주년이라서 상은이 이모가 로마로 기념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결혼 기념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나’ 했는데, 문득 로마에 가서 교황님을 만나 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이 교황님을 밖에서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일요일에 있다. 5월에 로마에 가기로 결정하고 지난 2월 교황청에 사연을 담은 이메일을 보냈다. 다행히 교황청에서 알현을 수락하는 답장이 왔다. 그런데 3월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건강이 안 좋아지시더니 4월 중순에 결국 돌아가셨다. 곧바로 새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시작됐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계획이 무산되는 게 아닌지 많이 걱정했다. 다행히 이틀 만인 5월8일(현지시각) 레오 14세 교황님이 선출돼서 5월21일 알현할 수 있었다.”



    - 느낌이 어땠나?



    “우리 자리가 교황님이 앉아 계신 단상 바로 옆이었다. 엄청난 행운이었다. 교황님이 우리 앞으로 오셨을 때 동생(상은씨 이모)이 ‘교황님, 제 언니 얘기에 귀 기울여 주세요’라고 했다. 내 앞으로 오셨을 때 미리 준비한 말씀을 드렸다. ‘제 아이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함께 간 이들의 명복과, 아직 진실을 몰라 찾으려고 노력하는 유족들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교황께서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시더라. 교황청에 보낸 이메일에 사연을 적어 보냈는데, 교황께서 그걸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교황께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보라색 팔찌, 리본, 그리고 별 배지를 드렸다. 교황님이 ‘이거 나한테 주는 거냐’고 하시면서 고맙게 받아주셨다.”



    - 특조위가 지난 6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특조위 활동 시한이 1년인데 벌써 4개월이 지났다. 3개월 연장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한이 너무 짧다. 조사는 대통령실까지 포함돼야 한다. 진상 규명에 그쳐서는 안 되고 책임자 처벌까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사는 또 반복된다.”



    -윤석열 정권은 유족들을 매몰차게 대했다.



    “거의 만행 수준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유족들의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유족들이 모이면 정부가 감당하기 힘들게 될까봐 그랬던 것 같다. 유족 가운데 한 분이 민변에 찾아가셔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을 계기로 유족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됐다. 윤 정권은 ‘참사’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느니,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부르라느니 별짓을 다했다. 세월호 참사 때처럼 정권이 위기를 맞게 될 것 같으니까 발악했던 것 같다. 대통령을 비롯해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권성동 등 당시 여당 의원들은 유가족을 대놓고 조롱했다. 유족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망언까지 나왔다. 윤석열은 우리가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해도 들은 척도 안했다. 대통령 부부는 49제 때 추모제에 참석하는 대신 소비 촉진 행사장을 찾았다. 방송에서 윤석열이 술잔을 구입하면서 ‘술 좋아한다고 술잔 샀다고 그러겠네’라며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이런 자가 대통령이 맞나 싶었다.”



    “참사를 겪고 나서 상실감이 컸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족 가운데는 아직도 봉안당에 못 가시는 분이 있다.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은 거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아직도 상은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집에 불쑥 들어올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은이가 남기고 간 뭔가를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족들은 일상으로의 회복을 꿈꾸지 않는다.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는 다른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은 가족들에겐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할 숙제가 생겼다. 그걸 위해 시민들과 만나고, 연대하고, 정부에 요구하는 거다. 다른 재난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활동이 우리한테 큰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피해자한테도 힘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가 단순한 슬픔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빛과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 윤석열 정권의 몰락은 시민들의 연대로 가능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시민들이 좀 더 관심을 보여주시면 제대로 될 것이라 믿는다.”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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