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93년 11월 4일 81세
성철스님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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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10일 해인총림 방장(方丈) 성철 스님(1912~1993)은 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성철 스님은 1967년 조계종 첫 총림(강원·율원·선원을 모두 갖춘 사찰)으로 지정된 해인사의 초대 방장(절의 최고 어른)으로 당시 불교계에 높은 명성이 있었다.
8년간 눕지 않고 앉아 참선한 ‘장좌불와(長坐不臥)’, 1947~1950년 한국 불교의 왜색과 기복신앙을 청산하고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고 내건 봉암사 결사, 방장 취임 후 행한 ‘백일 법문’ 등은 한국 불교의 신화처럼 전승되고 있다.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인터뷰. 1981년 2월 14일자 5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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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은 종정 추대 이전까지는 언론 인터뷰를 한 적 없는 은둔형 스님이었다. 신문에 간접적으로 언급된 적은 있다. 1973년 9월 서돈각 동국대 총장의 건강법에 대한 기사였다. ‘젊음을 지킨다: 명사들이 공개하는 나의 운동’이라는 시리즈의 여덟 번째 기사다. 서 총장은 새벽 5시에 일어나 108배를 20년간 해오고 있다고 했다. 이 기사에 성철 스님이 등장한다.
“서 박사에게 이 길을 걷게 한 분은 해인사의 방장으로 있는 성철 스님으로 한 번은 서 박사가 드물게 몸살을 앓아 예불을 쉬었는데 이것이 그 스님의 귀에 들어가 ‘몸이 아플수록 해야지…’ 하면서 크게 꾸중이 내렸다고 한다.”(1973년 9월 9일 자 조간 6면)
종정 취임 후에는 달라졌다. 인터뷰, 기자회견, 법어집 출간 기사 등이 잇달아 실렸다.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석가탄신 법문. 1982년 4월 20일자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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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정 취임 인터뷰는 속세에 처음 얼굴을 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중생에 첫 불안(佛顔) 보인 이성철(李性徹) 종정’. 사진 설명에는 ‘속세와의 첫 대면’이라고 썼다. 당시는 스님의 속성(俗姓)과 법명을 함께 쓰는 것이 관례였다.
기사 첫 문장은 성철 스님이 종정 취임 일성으로 한 법어(法語)로 시작한다. 성철 스님은 종정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법어만 보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萬物)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眞理)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山)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1981년 2월 14일 자)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은 이때부터 대중에게 알려졌다.
당시 한국 불교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신군부가 스님들을 대거 연행한 10·27 법난이 불과 두 달여 전 벌어진 일이었다. 내부 리더십도 불안정했다. 조계종 행정 수반인 총무원장은 1981년 1월부터 1982년 3월까지 1년여간 4차례 바뀌었다. 1983년 8월에는 신흥사 주지 자리를 둘러싸고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조계종 종단은 전 총무원과 비상종단운영회의 둘로 갈라져 싸웠다.
성철 스님 인터뷰. 1984년 3월 17일자 5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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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정으로서 성철 스님은 ‘은둔형’이 아니었다. 해인사를 찾아온 본사 주지 연합회 간부들에게 종단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종정, 종무 일원화 결단’(1983년 11월 22일 자)으로 해석됐다. 열흘 후 종정이 권한을 위임한 영암 스님은 전 총무원장 진경 스님에게 총무원장 직인과 종무 서류 일체를 인수했다. ‘조계종 분규 매듭’(1983년 12월 2일 자)이었다.
성철 스님은 이듬해 3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번 기회에 우리가 참다운 개혁을 해서 싸우지 않는 종단을 만들어야 해”라며 “개혁은 그동안 잘못을 털어버리고 교조(敎祖) 정신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변질된 폐단을 완전히 청소하고 교조의 근본 정신으로 환원하는 것이 개혁”(1984년 3월 17일 자)이라고 했다.
새 종헌 거부하는 성철 스님 인터뷰. 1984년 7월 10일자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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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론에 등장했다. 1984년 7월 8일 해인사에서 종정 취임 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 마련한 종헌(宗憲·조계종의 헌법)을 비판했다. 승려 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사람도 ‘보조 성직자’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부분을 문제 삼고, 종정으로서 강력한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내가 할 수 없이 맡은 종정이라도 불교의 근본이 흔들리는 이런 때 물러날 수는 없지. 내가 대표권을 가진 우리 종단의 최고 자리에 있다고 하니 지금부터라도 낮잠 안 자고 빠른 시일 내 종도들을 위한 일을 할 것입니다.”(1984년 7월 10일 자)
성철 스님은 ‘종정 사퇴 성명’까지 내면서 강력히 압박했다. 결국 종정을 지지하는 원로파가 소장 세력을 밀어내고 성철 스님의 뜻을 받아 종회(宗會) 회원 수를 35명에서 65명으로 늘리는 방안 등을 마련했다. (1984년 8월 26일 자)
성철 스님은 종정 임기 10년을 맞은 1991년 제7대 종정으로 다시 추대됐다. 이때도 총무원파와 반총무원파 간 긴 대립이 있었다. 성철 스님 종정 재추대는 일반 여론을 감안해 어쩔 수 없었다는 평이 나왔다.
“조계종 종정 추대는 불자들 못지않게 일반인의 관심사이기도 하며, 일반의 여론은 ‘이 시대에 성철 스님 만한 분이 있느냐’로 굳어져 있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1991년 8월 23일 자)
성철 스님 열반. 1993년 11월 5일자 15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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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은 1993년 11월 4일 열반했다. 10일 가야산 해인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사리는 최종 110과가 수습된 것으로 집계됐다. 일부에선 사리가 안 나올까 걱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법력이 높은 스님이라면서 사리도 없다니’ 하고 실망하는 신도가 생길까 걱정한 때문이다. 하지만 사리 수와 법력이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일탁 스님은 “성철 스님이 살아계셨다면 이런 짓을 크게 야단치시면서 사리를 뒷산에 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사리가 몇이며 모양이 어떤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야말로 속인들의 속된 관심이다. 중요한 것은 성철 스님의 수행 정신이고 그 깨침일 것이다.”(1993년 11월 14일 자 ‘만물상’)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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