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집무 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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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5일(현지시각) 러시아 안보 관련 정부부처에 핵무기 시험 준비에 관한 제안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은 같은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는 등 두 열강의 ‘핵무기 위협’ 치킨게임이 고조되고 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해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무기 시험 재개 방침이 “심각한 문제”라고 평가했다. 이어 “외무부, 국방부, 정보기관, 유관 민간 기관에 이 문제에 관한 추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 뒤, 핵무기 실험 준비를 시작할 여지에 대한 합의된 제안서를 안보회의에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며 “이것을 기초로 진행하자. 보고를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의 발언은 뱌체슬라프 볼로딘 러시아 하원(국가두마) 의장이 ‘의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핵무기 실험 재개 공언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 데 대한 대답이었다. 이 자리에는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 세르게이 나리시킨 대외정보국(SVR) 국장,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 안보회의 서기 등 러시아 핵심 안보 라인이 참석해 있었다.
참석자들은 미국 등 서방을 향한 위협의 목소리를 높였다. 푸틴 대통령은 “만약 미국이나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의 다른 당사국이 (핵무기) 실험을 강행한다면, 러시아 역시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에 벨로우소프 국방장관은 미국이 전략 공격무기를 증강한다며 “전면적 핵실험 준비를 즉시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그는 핵실험을 할만한 구체적인 위치로 북극 바렌츠해의 노바야제믈랴 제도를 꼽았다. 이곳은 러시아가 1950년대부터 핵실험 구역으로 사용한 장소다.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역시 “(러시아로서는) 지금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시간을 잃게 되고, 미국의 행동에 신속히 대응할 기회를 놓친다. 핵실험 준비엔 유형마다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고 보고했다.
러시아 크렘린은 회의 이후 푸틴 대통령의 말이 ‘즉각적인 핵실험 선언’은 아니라고 부연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타스에 “이번 지시는 즉시 핵실험 준비를 시작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준비의 타당성을 검토하라는 뜻”이라며 “구체적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결론을 내려면 미국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의 핵 3축(핵전략잠수함·전략폭격기·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핵전력 체계”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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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지난달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나라들의 핵실험 프로그램 때문에 우리의 핵무기 실험을 동등한 수준에서 시작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했다” 밝힌 지 6일 만에 나왔다. 푸틴 대통령은 같은 날 “누구든 (핵실험) 유예를 깨트린다면, 러시아는 똑같이 응수해주겠다”며 맞받은 바 있다. 이후 2일 트럼프 대통령도 미국 시비에스(CBS) 인터뷰에서 “러시아도 중국도 북한도 핵실험을 하고 있다. 우리도 실험할 것”이라고 응수하는 등 두 열강 정상이 연일 핵실험 위협의 판을 키워왔다.
미 공군 지구권타격사령부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우주군기지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3’를 시험 발사하며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미사일은 탄두를 탑재하지 않은 채 약 6800km를 날아가 태평양 마셜제도 시험장에 도달했다.
서방에서는 미국과 러시아의 때아닌 냉전식 핵 위협에 대한 우려가 커진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등을 계기로 러시아의 기존 군축 약속이 대부분 파기된 상태에서, 트럼프-푸틴이 주고받는 ‘말 폭탄’이 예측할 수 없는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옛 소련 1990년 이후 35년 동안 핵폭발 실험을 하지 않았지만, 2023년 11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 비준을 전격 취소하고 언제든 핵실험 재개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미국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 비준을 하지 않았지만 1992년 이후 핵실험이 없었다.
프랑스 르피가로는 “냉전 시대 강대국들은 ‘어디까지 가면 너무 멀리 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며 “반면 이제는 상황이 더 이상 규율되지 않을 위험 국면에 들어섰다고 서방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대부분의 핵군축 조약이 만료·파기되고, 재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만약 핵보유국 중 한 나라라도 핵실험 재개라는 금기를 깬다면, 다른 나라들이 따라하며 ‘행동–반응’의 악순환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는 심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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