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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20년 전 부산 APEC 호시절은 가고, 경주 APEC이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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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후진타오·푸틴이 한복 입고 서 있던 아름다운 기억

    지금은 탈세계화 흐름에 적응하며 미래 모색해야 할 때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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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2008년 무렵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토론과 논술 교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나도 교내 토론 및 논술 동아리에 꾸준히 참여했다. 주제는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논의되어 온 고전적인 윤리 문제들이 대다수였다. 체벌과 두발 규제, 안락사와 낙태 등등. 그런데 간혹 시사 이슈도 주제로 제시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2008년의 화두는 단연코 한미 FTA였다. 지도 교사는 학생들에게 한미 FTA 찬성 측과 반대 측 논거를 담은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ISD(투자자 국가 소송제)’가 왜 ‘독소 조항’인지 따위의 글을 보며 “미국과 FTA를 잘못하면 우리나라도 멕시코처럼 미국에 종속될 수 있겠구나”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2008년에 내가 접한 FTA 반대론은 한국 진보 진영에서 꾸준히 의제화한, 종속이론에 근거한 반세계화론이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반대 시위, 1999년 시애틀의 반세계화 시위, 2003년 멕시코 칸쿤의 WTO 반대 시위는 2008년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선진국 자본이 한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우리 농업과 산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러한 일련의 반세계화 시위와 시위의 두뇌 격인 지식인들이 생산하고 유통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자료로 접한 반세계화 시위의 가장 생생한 사례는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반대 시위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는 부시에게 반대하는 활동가들의 외침이 절절했다.

    2005년 부산에서 각국 정상이 한복을 차려입고 모인 때로부터 20년이 흘렀고, 이번에는 경주에서 다시 APEC 정상회담이 열렸다. 경주 APEC에 관한 뉴스를 찾아보며 20년 전 부산 APEC에 관한 자료들과 당시의 기록들도 살펴보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에 불과했지만, 정말 다시 오지 않을 호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한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년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바쁘다면서 경주 본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시진핑 주석은 특유의 못마땅한 표정을 거의 놓지 않았고, 러시아는 전쟁을 이유로 푸틴 대통령 대신 알렉세이 오베르추크 부총리만 파견했다.

    조선일보

    지난 2005년 부산 동백섬 누리마루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린 가운데 회의를 마친 21개국 정상들이 한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가운데가 노무현대통령, 노대통령 바로 뒤 부시 미국 대통령와 고이즈미 일본 총리(앞줄 오른쪽 세번째), 후진타오 중국 주석(앞줄 왼쪽 세번째) 등이 참석했다.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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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오콘 성향의 부시 행정부가 중동에서 전횡을 부리긴 했어도, 2005년은 미국의 절대 패권하에서 중국과 러시아도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 시기였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은 물론 전 세계 시장을 넘나들며, 세계화 게임의 최우등 플레이어로 활약했고, 그 덕택에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반대로 2025년 경주 회담은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무역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세계화 질서가 더 파열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한 몸부림이었다. 본회의 전 양자 회담들로 미·중 긴장을 일시적으로 낮출 수는 있었지만 이것이 구조적 해결이 되리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계화를 통해 우뚝 선 우리 입장에는 쓰라릴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탈세계화의 흐름에 적응해야만 하는 어려운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지점에 서게 되었는지를 차분히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2025년 경주 APEC만큼이나, 2005년 부산 APEC을 전후한 세계화의 전성기를 다시 떠올리며 오늘의 위치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과정에는 2008년 내가 열심히 읽은 반세계화론이 무엇을 정확히 짚었고 어디서 한계를 드러냈는지 재평가하는 일도 포함된다. 탈세계화의 시대가 현실이 되었지만, 당시 진보 진영이 그리던 미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AI 깐부’나 원자력 잠수함 이슈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번 APEC을 계기로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20년 전의 세계화·반세계화 논쟁을 되짚으며 앞으로를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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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APEC 2세션에서 서로 지나쳐 가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 다카이치 일본 총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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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묵 대학원생·'K를 생각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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