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간 인물 400여명 창조
배우 인생 자체가 아카이브
“양보하며 살았지만 손해 아냐”
그의 철학과 태도가 기억되길
사람은 크게 세 부류라고 이순재는 말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한국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그를 만들었다. 대학 전공은 철학. 지도교수 말마따나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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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애당초 삶의 계약서에 적혀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한 시대의 기록이자 증명,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발자취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료가 되고, 말과 행동, 심지어 침묵마저도 후세에 의미 있는 메시지로 남는다. 인생 자체가 보존하고 공유할 만한 아카이브가 되는 셈이다.
며칠 전 우리 곁을 떠난 이순재는 1934년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소년은 6·25 피란 시절 본 연극에 감명받아 배우를 꿈꿨다. 1956년 데뷔 이후 지난해 병마에 쓰러질 때까지 약 70년을 이 인물 저 인물에 ‘세 들어’ 살았다. 연극·영화·드라마를 합치면 경험한 인생만 400여 개다.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낙선과 당선을 맛보기도 했다.
각 세대마다 자신이 기억하는 이순재가 따로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야동 순재’라는 별칭으로 “할아버지가 저렇게까지?”라는 유쾌한 충격을 선사했다. 중년에게는 ‘사랑이 뭐길래’의 가부장적 폭군이나 사극 속 묵직한 인물로 각인돼 있다. 더 이전 세대에겐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지식인이나 강직한 정치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성공한 캐릭터를 우려먹지 않았다.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며 공감을 이끌어냈다. 출연작 목록만 봐도 한국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순재의 연기 인생은 그저 길기만 한 게 아니었다. 70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도전하며 모든 세대에 스며들었기에 그는 전설이 될 수 있었다.
‘직진 순재’라는 별명과 달리 그의 인생은 결코 직진이 아니었다. 때론 길을 잃고 갈팡질팡했으며 슬럼프도 겪었다.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작았고 오디션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는 연극 무대에 서며 발성·발음 등 기본기를 다졌다. 남자 배우들은 젊을 때 햄릿, 중년에 맥베스, 말년에 리어왕을 꿈꾼다. 햄릿·맥베스를 놓친 이순재는 여든일곱에 마침내 리어왕을 맡았다.
2021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연극 '리어왕'을 공연 중인 이순재. 그는 홀로 리어를 맡아 23회 공연을 모두 책임졌다. /파크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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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 충신과 간신을 분간하지 못한 리어왕은 배신당해 황야로 내몰리고 미쳐간다.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다음에야 진실에 눈을 뜬다. 공연을 앞둔 분장실에서 이순재가 들려준 말이다. “늙을수록 칭찬에 약한데 리어왕도 그러다 속아 넘어갔다.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아첨에 휩쓸리지 말고 쓰리지만 정직한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그는 나이 먹었으니 대접받아야 한다는 구시대적 태도를 멀리했다. 프로답지 못하고 무책임한 젊은 배우를 보면 호통을 쳤지만, 달래고 품을 줄도 아는 선배였다. “애벌레 시절의 인기와 돈에 취해 안주하는 자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다. 너희는 양아치나 깡패 연기는 천재적으로 해내지만 지적 표현은 미숙하다. 연기력을 갈고닦고 내면에 힘이 축적될 때까지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껍질을 벗고 날아오를 수 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은 오늘도 재방송된다. 출연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새로운 팬들이 날마다 생겨난다. 이순재는 그것을 ‘행복한 책임감’이라 표현했다. 좋은 배역을 낚아채던 동료들과 달리 그는 남의 배역을 빼앗은 적이 없다. 하고 싶어서 한 역할은 10편 중 1~2편. 그래도 이순재는 “연기 인생을 돌아보니 양보하며 산 게 큰 손해는 아니었다”며 웃었다. 장사는 밑져도 아주 거덜나지는 않은 상인처럼 호탕하게.
‘조진웅 사태’를 보면 악인은 죗값을 치르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대중은 생각하는 것 같다. 날마다 밀려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 어떤 사건은 너무 빨리 제멋대로 흘러가 버린다. 이순재는 붙잡아 두고 싶다. 한국 사회와 문화가 알게 모르게 큰 신세를 졌다. 그의 철학과 태도는 오래 기억되고 공유돼야 한다. 옛날 옛적에 이순재가 살았다.
추모 다큐 '배우 이순재, 신세 많이 졌습니다' 방송 화면. ‘꽃보다 할배’ 등으로 각별한 배우 이서진이 내레이션에 참여했다. /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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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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