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69번째 레터는 브로드웨이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인 키아누 리브스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아니, 영화 레터에 무슨 연극, 하실 수 있는데, 이유는 우선, 제가 그저께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1열 직관으로! 키아누 리브스 팬들 많으시죠. 그의 연극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실 듯 해서 (보고 온 자랑 위주로) 보내드립니다. 단도직입, 좋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암요, 어떻게 안 좋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1열에서 보면 목이 꺾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냥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작품도 전체적으로 좋았느냐, 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 본문에서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릴게요.

Broadway play 'Waiting for Godot', Directed by Jamie Llo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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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브로드웨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게 된 것은 휴가지를 뉴욕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사흘 있었는데 짧고 굵게 다녀오다보니 내내 시차 적응을 하는둥마는둥 비몽사몽 다녀왔습니다. 뉴욕 가는데, 오호라, 키아누 리브스가 연극을, 그것도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다니, 1열에서 봐주리라, 싶었죠. ‘고도를 기다리며’는 계속 고도를 기다리다 끝나는 작품이니 대사가 영어라 해도 해석의 압박도 적고요. “Let’s go”, “We can’t”, “Why not?”, “We are waiting for Godot”.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그날 공연의 감동을 가져가기엔 큰 무리가 없는, 신기한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기 전에 예매는 하고 갔어요. 바다 건너 보러 가는데 좋은 자리 맡아놔야죠. 사흘간 2번 봤는데, 첫번째는 1열 가운데 좌석에서, 두번째는 앞에서 6번째줄 좌석에서 봤습니다. 1열 예매할 땐 걱정이 되긴 했어요. 공연장인 허드슨씨어터가 1000석 가까운 규모인데 1열이면 고개를 완전히 꺾다시피 봐야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그래도 질렀습니다. 두번째 볼 때는 가운데이되, 좀 더 시야가 넓게 확보되는 좌석으로 골랐고요.

브로드웨이 연극, 게다가 키아누 리브스 같은 스타가 나오는 공연이면 티켓이 얼마야 궁금하실 수 있겠네요. 브로드웨이 공연은 같은 좌석이라도 요일마다 다르고(100달러 이상 차이날수도), 예매처별로도 꽤 다릅니다. 티켓 중개사이트보다 극장 홈페이지에서 구매하시는 게 싸요. 제가 선택한 1열 중앙 좌석은 가장 비싼 프리미엄+++ 좌석으로, 502.88달러. 한화로 74만원쯤이군요. 헛, 너무 비싸, 하실 수 있는데 같은 좌석이 12월 첫 주 토요일에는 592.48달러(87만원)입니다. 아마 크리스마스 같은 대목에는 더 올라갈 거 같지만 무서워서 확인해보진 않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래도 팔린다는 것. 그래서 브로드웨이죠. 스타 파워가 더해지니 더더구나. (제가 본 이틀 모두 거의 만석이었습니다)

저의 두번째 관람인 F열 좌석은 프리미엄+ 좌석으로 295.68달러(44만원). 평일 중에선 비교적 가격이 내려간 날이라 싸게(?) 봤습니다. 아니, 한 번 보면 됐지 뭘 두 번씩이나, 하실 수 있는데 이게 다 시차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다보니, 낮밤이 바뀐 신체 리듬으로 공연 감상을 한 번에 끝내는 게 어렵거든요. 2018년에 키트 해링턴(‘왕좌의 게임’ 존 스노우)이 출연한 ‘트루 웨스트’를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봤는데, 도착 첫 날 의욕에 불타 시차 역전된 채 관람하다가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아직도.

키아누 리브스의 브로드웨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세트 전체 모습입니다. 제 카메라로는 전체 무대를 찍기 어려워 프레스 포토로 보여드려요. 멋지지 않습니까. 저는 신선하고 파격적인 해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깐깐한 사뮈엘 베케트옹이 보시면 대경실색하실 것 같네요. 사진 왼쪽이 키아누 리브스(에스트라공), 오른쪽이 알렉스 윈터(블라디미르)입니다. Directed by Jamie Lloyd. Sets and costumes, Soutra Gilmour; lighting, Jon Clark; sound, Ben and Max Ringham/Andy He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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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돈을 들여 볼 만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라이브 공연은 세상에 단 한 번 존재하는 거니까요. 똑같은 배우, 똑같은 작품이라도 이 세상에 같은 공연은 없죠. 오직 그 순간, 무대에서 살아 숨쉬는 작품과 함께 호흡하는 그 순간에 그 정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렇다는. 아마 그래서 문화부 기자를 재밌게 하는지도요.

이번 ‘고도를 기다리며’도 시차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관람했으나 그래도 두 번 봤으니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고도’ 내용이야 다들 아실 거라 이번 프로덕션의 특징이 중요하겠죠. 키아누 리브스가 에스트라공이고, 블라디미르 역을 알렉스 윈터가 맡았습니다. 알렉스 윈터가 누구냐, 키아누와 ‘엑셀런트 어드벤처’(1989)에 같이 나온 그 배우입니다. 두 사람이 오래된 친구라서인지 미국에선 둘의 조합에 기대가 높더군요. 애초에 이번 연극을 키아누가 알렉스한테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불러들인 연출가가 제이미 로이드. 요즘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입니다. 고전의 새로운 해석과 스타 캐스팅으로 유명한데요, 마블의 록키 역으로 유명해진 톰 히들스턴의 ‘배신’, 영화 ‘백설공주’ 주연 레이첼 제글러의 ‘에비타’, 흑인 줄리엣과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의 로미오로 떠들썩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이 있네요.

제이미 로이드의 연극에서 늘상 나오는 말이 ‘스타일이 내용을 앞선다’는 평가입니다. 이번 ‘고도’도 스타일이 강한 것은 확실합니다. 우선, ‘고도’ 무대의 기본이자 중심인 나무를 없애버렸어요.(나무는 대사에만 등장합니다. 객석 어딘가 저 너머에 있는 걸로) ‘고도’ 희곡 첫 문장이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입니다.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가 딱 정해놨어요. 그런데 시골길도 아니고 나무도 없애버린 것이죠. 생전 베케트옹이 매우 깐깐하고 일일이 간섭한 걸로 유명해서 아마 이번 ‘고도’를 보시면 “이게 뭔 짓들이냐”며 격분하셨을지도요. 내키지 않는다며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도 안 나타나시고, 인터뷰도 한 번 안 한 괴팍한 분이시니.

브로드웨이 허드슨씨어터 1열 가운데 자리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때 두 배우가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제 왼쪽 관객이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서서 기립박수하는 통에 박수치는 그의 손이 잡혔네요. 저도 박수치느라 사진찍느라 카메라 초점이 약간 나갔습니다./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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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좋았습니다. 단순히 파격을 위한 파격이 아니라 신선하면서도 작품의 의미를 아주 잘 살렸다고 봅니다. 베케트옹이 지정한 시골길 대신 나무로 만든 커다란 터널을 들여놨는데 언뜻 보면 영화 ‘듄’에 나오는 모래벌레의 뱃속 같으면서, 삶이라는 끝모를 터널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앞에서 선 두 존재는 홍수라도 닥치면 일거에 쓸려나갈 듯한 미약함과 두려움도 느껴지더군요. 밤이 되면 터널 끝에서 거대한 광채를 뿜어내는 달이 뜨는데, 조명 디자인 역시 전체 무대와 조화를 이루면서 빛과 어둠의 대조가 희망과 절망의 온오프를 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2막에선 두 배우가 모자 주고받기 같은 희곡 원래의 연기는 물론이고 터널 위아래를 오가며 슬랩스틱도 보여주는데 벗어나려 몸부림쳐도 미끄러지기만 하는 그 모습이 갇힌 자, 사로잡힌 자의 한계를 서글프게 보여줬고요.

자, 이쯤에서 묻고 싶으시죠. “그건 그렇고, 키아누 리브스 연기 잘했어?” 1열 직관으로 보니, 키아누 리브스는 키아누 리브스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스타의 육체성이 배우의 연기력을 압도했다고나 할까요. 1열, 제가 앉았던 A107 좌석에서 보면 키아누 리브스 오른쪽 정강이 생채기까지 다 보였거든요.(‘존 윅’ 찍다가 난 것일까요) 시작하자마자 에스트라공이 한쪽 신발을 벗으려고 애쓰는데, 벗고 나서 다리를 쭉 뻗어 맨발을 보여줍니다. 이때 발을 뻗는 각도가 정확히 제 자리 A107 방향이었어요. 덕분에 키아누의 맨발을 아주 생생하게 목격했답니다. 문제는, 에스트라공의 맨발로 보여야하는데 키아누의 맨발로 보였다는 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연극 시작하고 불과 몇 분 후라 작품에 몰입이 덜 된 시점이기도 했고요. 애초에 제가 에스트라공이 아니라 키아누를 보러가긴 했죠.

'고도를 기다리며' 커튼콜 때 럭키 역의 마이클 패트릭 쏜톤 배우가 기부를 독려하며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브로드웨이 작품끼리 기부액 모금 경쟁을 하고 있다며 "너무 오래 공연 중인, 얼룩말 나오는 그 공연(뮤지컬 '라이언 킹') 말고 저희에게 기부해달라, 어쩌면 제가 휠체어에서 일어설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서 폭소가 터졌습니다./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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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키아누가 에스트라공으로 보이려고 하는데, 완고한 비평가들에게는 매우 큰 감점이 될 장면이 등장합니다. 에스트라공이 “예전 좋았던 그때처럼 말야”라고 말하면서 블라디미르와 함께 기타 치는 시늉을 하거든요. 이때 객석이 문자 그대로 빵터집니다. 박수도 크게 나오고요. 두 배우의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가 연상되는 모습이라서요. 팬들에겐 일종의 선물 같은 장면이었을텐데, 글쎄요, 저에겐 작품의 몰입이 크게 깨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아니라 키아누 리브스와 알렉스 윈터가 튀어나왔으니까요. 그래, 그냥 키아누 리브스를 보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니 훨씬 편해졌지만 베케트옹의 탄식이 들린 것은 단순히 환청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포조(실제 발음에선 ‘팟죠’로 들리더군요, 브랜든 J. 더든)와 럭키 배우(마이클 패트릭 쏜톤)도 연기를 잘했는데, 한가지, 럭키의 해석엔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고도’를 볼 때마다 가슴에 쿵쾅 내리치는 장면이, 포조의 “생각해!”라는 명령과 함께 발작하듯 쏟아지는 럭키의 장광설(책으로는 3페이지 분량, 쉼표도 없이 이어지는 거센 폭포수 같은 문장으로)인데, 이번 버전에는 굉장히 다르게 표현되거든요. 휠체어에 탄 럭키가 칫칫 입소리를 내면서 마치 어느 현자의 현학적인 읊조림처럼 대사를 이어나갑니다. 길이도 확 줄었어요. 대부분 7~8분 쭉 이어지는데 이번 버전에선 절반 이하. 그러다보니 포조가 노예처럼 대하는 럭키의 불가해한 비극성이 희석되면서 나중에 장님이 된 포조 캐릭터까지 약화되고요. 이 부분 역시 원전에 얼마나 충실해야하느냐에 대한 관점 차이일수도 있긴 해요.

키아누 리브스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9월 13일 프리뷰, 9월28일 정식 개막했는데 두 달이 안 돼 투자비 750만달러, 한화로 110억원을 이미 회수했다고 하네요. 이래서 영화는 물론이고 연극도 스타 파워를 무시 못하는 것이겠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키아누 리브스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년 1월4일까지 합니다. 그전에 뉴욕에 가신다면 꼭 한 번 보세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옛날옛날 학창 시절부터 이번까지 여러 배우의 다양한 버전으로 봤지만, 뜻밖으로 가장 좋았던 버전은 10년쯤 전에 본 장애인 극단 ‘애인’의 공연이었습니다. 별다른 기대 없이 갔던 그날, 대학로의 좁고 오래된 지하 공연장에서 무명의 장애인 배우들이 보여준 ‘고도’는 그 어떤 유명 배우의 알려진 공연보다 더 깊게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왜 그럴까, 한참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간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도가 올 지 안 올지 모르지만, 아마도 안 올 거 같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기다림. 간절한 그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배우의 명성도 연출자의 인지도도 부차적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더욱 더 ‘고도를 기다리며’가 시대 불변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작 중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간절하게 시작하고 계신지요. 오늘은 마침내 그 무엇이든 기다림에 답을 받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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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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