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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금)

    [강성민의 문화 이면]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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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역사가는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한다." 영국 역사가 루이스 네이미어의 말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역사가에게만큼은 과거가 미래이고 미래가 과거인 듯한 이 경구는 어떤 되돌아봄의 통찰을 요구한다. 과거는 지나온 것이다. 우리의 손을 떠났고 기억에만 남아 있다. 반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역설은 강렬하지만 그 말의 진의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과거를 상상한다는 말은 이해가 간다. 과거의 모습은 그걸 기억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나의 경험을 벗어나는 영역은 상상과 추론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이미어가 "과거를 상상한다"고 말한 것은 좀 더 적극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건·사고의 연표로 재구성된 역사보다 더 깊은 역사, 사건을 넘어 그 사건을 일으킨 인간의 심리 혹은 그런 과거의 인간 행동을 마주한 역사가의 현재 심리를 추궁해 들어가는 듯한 발언이다.

    크라카우어는 '역사'에서 네이미어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네이미어는 역사가들에게 정치적 이념의 '심리적 원천'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적 충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현대 역사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역사가가 대중심리학을 알아야 한다고 강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변의 감정들이다. 가령 그것은 음악이다. 이념이란 그 음악의 가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저질 가사일 때가 많다."

    네이미어가 활동한 20세기 전반기는 이념의 시대였다. 민족주의, 파시즘 등의 이념이 어마어마한 폭력으로 표출되었다. 이념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고 죽이게 만드는 것일까. 그가 볼 때 이념은 인간의 은밀하고 나약하고, 저열하고 침울하며, 채색되고 변질되는 '감정의 잔여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네이미어가 이념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요즘 우리가 팩트를 대하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념이라는 것은 가치 판단의 영역이지만, 팩트는 사실과 상식의 영역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같은 '사실'에 대해 힘겨루기나 유불리에 따라 상반되게 주장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은 하나이겠지만, 실제로는 여러 개로 유통되고 있다. 사실이 여러 개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게 사실의 사전적 정의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건 단순한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증오와 폭력'이 모습을 바꿔 드러난 것일 수 있다. 20세기에는 '이념'으로 드러났고, 지금은 '팩트 조작'으로 드러난다. 거기 깔린 건 음습한 감정들이다. 질투와 증오, 열패감에 따른 복수심이기도 하다. 사회가 굴러가면서 뒤로 처지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른바 보수라 칭했던 자들이 지금 하는 행태를 보라. 도저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조작된 정보를 사실이라 믿으며 증오의 탑을 쌓아올리는 연령 집단의 출현으로 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규 교육은 이들에게 사실 판단의 능력을 길러주는 데 실패했다. 이른바 미디어 리터러시는 너무나 취약해진 반면, 미디어 조작은 밥술 푸듯이 쉽게 한다. 이들은 그런 왜곡된 자기합리화로 인해 더욱 취약해지고 정상 경로로 사회적 우위에 다시 올라설 수 없다. 그런 운명적 무기력함이 언어와 팩트 왜곡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 지금 벌어지는 온갖 잘못과 어리석은 행동들은 역사라는 창고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운 과거는 좀 더 먼 과거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러니 과거는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공간이다. 과거를 적극적으로 탐험해보라. 그렇게 할 때 인간은 결코 교만해질 수 없다. 억울할 일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나는 역사가 합리적 이성을 길러내는 자양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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