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근이 1900년 무렵에 그린 '갖바치' /인터넷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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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백정도 4등급이 있었어요. 그중에서 갖바치가 가장 밑바닥이라고 합니다. 갖바치는 혹시 양반 집에 들어갈 때도 대문으로 못 가고 대문 옆의 조그만 개구멍 같은 데로 기어 들어가서 신발 크기를 쟀다고 해요. 최하층 천민이었던 이 갖바치들에게 한글 성경을 가르친 교회가 승동교회입니다.”
강호유람은 계룡산과 지리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만회담(萬灰潭) 고택이 강호였다. 만회담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한국 교회사 전문가인 김명구(69) 선생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받았다. 갖바치는 소가죽을 벗겨 가죽 신발을 만드는 천민이었다. 백정도 소를 직접 도살하는 역할이 맨 위 등급이고, 그다음에 해체하는 역할, 그리고 배분이 있고, 마지막에 갖바치가 있었다. 백정 출신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장로를 했고, 박성춘의 아들이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하나였다.
승동교회는 인사동에 있다. 원래는 여기에 불교 승려들이 살아서 승동(僧洞)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승동(勝洞)으로 바뀌었다. 승동 근처에 백정들이 모여 살았다. 양반과 백정이 한 교회에서 같이 못다닌다고 해서 양반들은 묘동교회로 가고 천민은 승동교회로 가게 되었다.
서울 YMCA는 1906년 공예교육과를 설치했다. 손으로 일하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던 유교적 풍속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공예교육과에는 철공과, 목공과, 사진과, 인쇄과 그리고 제화과가 있었다. 제화(製靴)과는 갖바치가 양반에게 바치던 가죽 신발 작업을 ‘모던 보이’가 신는 명품 구두로 환골탈태시키는 과정이었다. 제품을 판매하는 학생에게는 급여도 지급했다. 대하소설 ‘임꺽정’의 앞부분에 갖바치가 등장한다. 임꺽정의 멘토 비슷한 역할이다. 왜 갖바치가 앞부분에 나오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다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벽초도 당시에 YMCA를 다녔다고 하니 충분히 짐작이 된다.
기독교가 구한말에 들어와 얼마나 통쾌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 통쾌함이 얼마나 혁명적인 작업이었는지 알게 해주는 일화들이다. 만회담에 가게 된 이유는 함재봉이 지은 ‘한국 사람 만들기’(친미기독교파)의 출판기념회였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지만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먼지를 털고 다시 꺼내 ‘한글 성경’(1882)으로 번역하여 하층민에게 가르친 주체는 개신교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필자가 근래 30년 동안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이 함재봉 선생의 책들이다.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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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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