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백악관 만찬장.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최한 테이블에서 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인공지능(AI)·가상화폐 차르와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마주 앉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로를 '민주주의의 적'이라 비난하던 그들이다. 상상하기 힘들었던 이 장면은 지금 실리콘밸리와 워싱턴의 권력 지도가 '이념'이 아닌 '이익'을 중심으로 얼마나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상징한다.
최근 뉴욕타임스(NYT)에서 색스가 백악관 직위를 이용해 자신이 운영하는 벤처캐피털 '크래프트 벤처스'의 투자 가치를 높이고 지인들의 기업에 유리하도록 정책을 주무르고 있다는 의혹을 터뜨렸을 때, 실리콘밸리의 반응은 "나도 데이비드 색스다(I am David Sacks)"는 집단적 커밍아웃이었다. 샘 올트먼 등 테크 거물들은 입을 모아 "규제를 혁파해 줄 전문가가 필요하다"며 옹호했다. 단순한 제 식구 감싸기가 아니다. 실리콘밸리가 기술 개발을 넘어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워싱턴DC로 진격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수치도 이를 따른다. 2025년 상반기 미국 테크 기업들이 연방 로비에 쏟아부은 예산은 무려 3600만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오픈AI는 워싱턴DC에 사무소를 열며 정치권과의 스킨십을 본격화했다. 그레그 브로크먼 오픈AI 사장과 앤드리슨호로위츠, 팰런티어 공동 창립자 등은 2억달러 규모의 자금을 모아 '리딩 더 퓨처'라는 슈퍼팩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들의 목표는 AI 혁신을 지지하는 후보에게 선거 자금과 광고로 힘을 실어주고 규제를 외치는 정치인은 낙선시키겠다는 것이다.
'킹메이커' 피터 틸 역시 20여 년간 운영해 온 비밀 모임 '다이얼로그'를 워싱턴DC 외곽 상설 캠퍼스로 옮긴다. 웹사이트도, 명단도 없는 이 모임은 '테크 시대의 빌더버그'라 불리며 실리콘밸리와 워싱턴의 장기적 결탁을 위한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정치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AI 규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자칫 산업 전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 또한 미국 정부의 AI 예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정책 입안자와의 접점은 곧 수주 경쟁력과 직결된다.
여기에 '중국'이라는 변수는 이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진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대중국 수출통제 완화를 위해 워싱턴을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펼치고, 구글과 메타를 겨냥한 사법부의 반독점 칼날이 무뎌지는 기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미국 기업을 규제로 옥죄는 순간, 기술 패권은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안보 불안을 파고들었다.
미국에서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산업, 안보, 정치가 덩어리로 얽힌 '국가적 전략 자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리콘밸리는 단순한 기술 공급자로 남기를 거부하고 국가의 파트너이자 규칙 제정자로 격상되기를 원한다.
마치 실리콘밸리가 거대한 도박을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AI 시대,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엄격한 견제' 대신 '효율적 밀월'을 택했다. 이 도박이 성공한다면 실리콘밸리는 '미국의 기술 패권을 지켜낸 구원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국가는 특정 기술 권력에 종속되는 역설적 결과를 맞을 수 있다. 기술과 정치가 전례 없이 밀착하는 지금, 전 세계의 미래를 건 위험한 줄타기를 실리콘밸리 한복판에서 목격하고 있다.
[원호섭 실리콘밸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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