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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 (목)

    ‘배우’는 갑옷이자 훈장이었다... 은막의 스타 김지미, 85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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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일 싫어하는 별명”

    한국 영화 성장기 대표 배우 김지미 떠나

    조선일보

    배우 김지미는 2019년 본지 인터뷰에서 “제 묘비에는 ‘한 배우로, 한 여자로,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새겨달라”고 했다./김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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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최고의 흥행 여배우이자 여걸, 미인의 대명사이자 팜 파탈의 상징, 여성 영화제작자의 시대를 열었던 원로 배우 김지미(85)가 별세했다.

    고인의 별세 소식을 전한 이장호 감독은 10일 본지 통화에서 “미국에 사는 김지미씨의 딸 밍크(한국 이름 최영숙)로부터 지난 7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최근 지병으로 요양원에서 지내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지미는 한국영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다. 1970·1980년대 부흥기의 중심에서도 활동했다. 1940년 충남 대덕에서 인쇄기계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의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덕성여고 재학 시절 작은엄마가 운영하던 명동 배꽃다방에 가던 길에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었다. 김 감독은 “사람이 어떻게 저리 예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를 즉석에서 캐스팅했다. 17세에 김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1957) 주연으로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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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영화 ‘육체의 약속’으로 대종상을 받던 때의 김지미 모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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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별아 내 가슴에’로 곧바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영화보다 더 큰 화제는 그와 감독의 결혼이었다. ‘별아 내 가슴에’의 홍성기(1924~2001) 감독과 결혼할 때 그의 나이 불과 18세. 10대 스타와 16세 연상 감독의 결혼으로 장안이 들썩였다. 이후 대표작 ‘토지’(1974, 감독 김수용) 등 7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황진이, 장희빈, 비구니, 바람난 주부, 순애보 여성, 대갓집 안방마님 등 시대와 성격을 넘나드는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다. 청룡영화상(‘너의 이름은 여자’·1970), 대종상(‘길소뜸’·1985), 백상예술대상(‘티켓’·1987) 등 배우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연기상을 받았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가 제일 싫어하는 별명”

    배우 경력만큼이나 화려한 사생활로도 주목받았다. 첫 남편인 홍 감독과는 결혼 4년 만인 1962년 이혼했다. 이혼 직후 배우 최무룡(1928~1999)과 스캔들이 불거졌다. 김지미는 훗날 “둘이 촬영장에 종일 붙어있다 보니 정이 들었는데 어느 날 (스캔들이) 빵 하고 터졌다”고 했다. 최무룡의 부인인 배우 강효실은 “아이(배우 최민수)를 낳고 열흘 만에 남편과 김지미의 간통 사실을 확인했다”며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두 배우는 구속됐으나 김지미가 강씨에게 당시 최고 위자료 400만원을 물어주고 석방됐다. 김지미는 간통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를 두고 김지미는 나중에 “사람들은 참 희한한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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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구니'에 출연한 김지미(왼쪽)./ 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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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무룡과 결혼했으나 7년 만에 이혼했다. 최무룡이 남긴 “지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최무룡과 이혼 후 1976년부터 6년간 일곱 살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 1991년 모친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만난 심장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다시 결혼했으나 11년 만에 헤어졌다. 김지미는 2010년 본지 인터뷰에서 “살아 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며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라는 말을 남겼다. 빼어난 미모와 스캔들 탓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렸으나 그 자신은 그 별명을 몹시 싫어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라며 “김지미는 김지미인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는 건 너무 저질스러운 얘기”라고 했다.

    “남자보다 더한 카리스마… 호탕한 여걸이었다”

    그와 함께 일한 영화인들은 “남자보다 더한 카리스마와 리더십”(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그를 기억했다. 강한 추진력으로 직접 영화사를 차리고 성공한 첫 여성 제작자였다. 남성이 장악했던 영화계에서 드문 행보였다. 1985년 지미필름을 세우고 처음으로 선보인 ‘티켓’(감독 임권택)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제작한 ‘명자 아끼꼬 쏘냐’(1992, 감독 이장호)는 그의 연기로 주목받았으나 관객 동원은 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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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기는 영화 ‘너의 이름은 여자’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했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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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제가 개인적으로 빚진 유일한 영화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70년 신민당 대선 후보전에서 YS와 DJ가 경쟁하던 무렵, DJ의 기자회견장에 배우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지미는 “너무 썩고 냄새 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때였다”고 했다.

    한국 영화계 발전을 위해 행정가로도 뛰었다. 1995년 16대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98년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지냈다. 2000년 6월 17대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내다 중도 사퇴하며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영화인협회가 문성근·명계남 등이 주축이 된 충무로포럼과 이견을 빚으면서 갈등이 촉발됐다. 표면적인 문제는 성인 전용관 설립이었으나 오래 누적된 영화계 신구 세대 갈등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이사장을 그만둔 그는 미국으로 떠나 작고할 때까지 자녀들과 LA에서 지냈다. 미국살이 중에도 고국 사랑을 잊지 않았다. 2021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 6·25 미군 참전용사 기념비가 건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2만달러(당시 한화 약 2300만원)를 쾌척했다.

    평생 ‘나는 배우’라는 자긍심을 훈장이자 갑옷처럼 입고 살았다. “누구도 나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버텼다”며 “별걸 다 견뎌야 하고 별걸 다 극복해야 하는 게 배우”라고 말했다.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평생 몸무게 48~49㎏ 사이”라고 했다. ‘티켓’ 출연 때 40대 중반이었으나 대역 없이 전라 노출을 소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 입문 권유도 있었으나 “나는 국회의원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김지미로 만족한다”며 거절했다.

    2019년 본지 인터뷰에서 “묘비명으로 새기고 싶은 문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한 배우로서, 한 여자로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새겨주세요.”

    [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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