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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 (목)

    [일사일언] 설국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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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첫눈이 내렸다. 겨울의 입구가 활짝 열렸다. 눈송이, 눈보라, 눈사람, 눈밭, 눈꽃 등등 설국의 언어로 꾸며진 문학 작품을 다시 찾게 된다. 한국 소설 중에서 설국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린 작품을 꼽으라면 김주영의 장편 ‘홍어’(1998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백산 남쪽 막바지 기슭에 놓인 마을이 밤새 내린 폭설에 뒤덮인 어느 날 새벽. 이 소설의 소년은 잠에서 깬 뒤 거위 털 같은 함박눈이 내려 쌓이는 세상을 마주한다. 밤새 내린 눈이 툇마루까지 덮은 탓에 문고리를 잡고 애써 밀어도 방문은 잘 열리지 않는다. 한창 씨름한 뒤 반도 채 열지 못한 문 사이로 보이는 은세계 위로 나비 같은 눈송이가 흩날린다.

    소년의 마을은 겨울이면 자주 폭설을 겪는다. 눈이 쏟아질 징조가 보이면 마을 사람들은 집집을 새끼줄로 연결한다. 다음 날 이웃집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쌓이면 새끼줄을 흔들어 서로의 안위를 점검한 뒤 눈덩이 사이로 옹색한 통로를 만들곤 한다. 설국의 오랜 풍습이다.

    밤새 내린 눈은 동이 터도 그치지 않을 때가 있다. 바람에 흩어진 눈가루가 열린 부엌문 틈으로 들어와 민들레꽃씨처럼 날린다. 창호지를 후려치는 눈보라는 모래알을 쥐어 뿌리는 것처럼 요란스럽다.

    눈이 그치면 지붕이 무너지지 않도록 눈을 치워야 한다. 그런 날 지붕에 올라가면 유난히 새파란 하늘이 손에 잡힐 듯하다. 지붕을 덮은 눈이 햇살을 힘차게 튕겨내는 바람에 눈이 시리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한 손으로 닦으면서 다른 손으론 눈덩이를 밀어낸다.

    오래간만에 책꽂이에서 다시 꺼낸 소설 ‘홍어’. 곳곳이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다. 설국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 서정성의 향취가 짙게 풍긴다. 젊은 날의 내가 몽환 속을 거닐 듯 밑줄을 친 모양이다.

    눈보라는 차갑지만, 눈송이라는 단어는 왠지 포근하다. 눈에 얽힌 추억이 솜이불처럼 가슴 한구석을 데운다.

    /박해현 ‘한국문학’ 편집위원

    [박해현 '한국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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