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
대학 4학년을 앞둔 때였다. 미팅 상대가 물었다. 집이 어디냐, 부모님은 뭐 하시냐, 졸업 후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 과천에 산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전업주부, 졸업 후엔 군대 갈 것 같다고 답했다(이런 답충!).
조건에 맞으면 계속 만나고, 아니면 애프터는 없다-그런 뜻이었을까. 상대는 결혼이 자신의 일에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한다며 남편, 아니 시댁의 지원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속으로는 결혼 생각이 1도 없었지만, 겉으로는 "부인이 하고 싶은 일 말릴 생각 없다,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경제적 지원이 꼭 있어야 한다"고 되받았다.
정상적인 대화는 대충 그쯤에서 끝났다.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졌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오래 기억날 것 같다고 상대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답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허언은 아니었나 보다. 다만 이름이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조건은 따질 수 있다. 그래야 할 때도 물론 있을 것이다. 콩깍지가 벗겨지면 곧바로 현실의 벽이 나타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첫 만남부터 들이댄다면 과하다. 준비성 강한 젊은이라 좋게 볼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야 만리장성을 쌓든, 달나라에 가든 누가 뭐라 할까마는 굳이 입으로, 겉으로.
말의 범위 혹은 표현의 한계는 살아가며 너무도 자주 마주치는 문제다. 개인 간의 소소한 언쟁에서 회사에서의 갈등, 나아가 국가 간의 전쟁까지-안 해도 되는 말, 하지 않아야 할 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열 살도 아는 일을 어른들은 모른다. 배운 사람일수록 말의 경계를 더 자주 넘고 침묵의 기회를 더 많이 잃는다.
황성 화백의 무협만화 '백협전기'를 보자. 하찮은 출신이라며 막말을 쏟아내는 세가 자제들에게 동네 건달 청풍이 말한다. 차별을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은 마음을 충분히 담지 못한다. (모국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뜨겁게 사랑하다가 서로의 언어(혹은 공용어)를 알게 된 후 헤어지고 만다는 스토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이 그럴진대 다른 건 오죽할까.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표현하는 도구지만 그 도구는 종종 혼란 그 자체가 된다.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가'와 '말해질 수 없는가'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말과 침묵, 화자와 청자의 상대성. 결국 해답은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있다. 뉴욕의 작가 프랜 리보위츠는 '나, 프랜 리보위츠'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하기의 반대는 듣기가 아니다. 말하기의 반대는 기다리기다." 그렇다. 기다림이라는 침묵 속에서 말은 힘을 얻고, 잊힐 기회를 얻는다. 말보다 침묵이 안전할 것 같다고 해서 어지간하면 피해야 할까. 아니다. 실언하고 후회하고 사랑하고 오해하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것보다 백배 천배는 낫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나의 말이 타자에게 칼이 되거나 타자의 말이 내게 칼이 될 수 있다면 그럴 땐 조금 비겁해 보여도, 멍청해 보여도 물러서는 게 좋다. 문제는 '그때'를 어떻게 구별해 내느냐는 것이다.
어렵다. 그래도 말이 말 같지 않은, 말이 많은 세상에서 말인 척하는 말과 글인 척하는 글을 다루는 일을 하며 수십 년을 살아보니 이쯤은 알게 됐다. 헛갈릴 때, 상황 파악이 안 될 때라면 이것 하나는 기억하라는. 그럴 땐 "그 입, 다물라".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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