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준 현대바이오사이언스 사장 |
신약 개발은 질병·병리기전에 대한 타깃을 찾고 후보를 좁혀 임상으로 가는 긴 여정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지나치게 느리고 성공률이 낮다는 점이다. 인공지능(AI)이 이 오래된 공식을 다시 쓰고 있다. 타깃 규명 단계에서 AI는 속도와 정확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제넨테크는 루푸스 병리에서 수년이 필요하던 핵심 타깃을 AI 분석으로 수주 만에 도출했고, 아스트라제네카는 기존 문헌에 없던 신규 타깃을 데이터 기반 추론으로 찾아냈다. 질병의 기전을 밝히는 출발선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타깃이 정해지면 AI는 수백만 개의 Compound(후보 분자)를 가상에서 평가해 Hit(초기 약물 씨앗)를 신속히 좁힌다. 애텀와이즈는 820만개의 화합물을 하루 만에 분석해 에볼라 억제 Hit를 도출했고, 화이자는 코로나19 초기 팍스로비드 후보를 수주 내로 확정했다.
Hit 중 극히 일부만 Lead(유망 후보)로 이어지는데, 이 단계에서 AI는 사실상 '설계자'로 기능한다. 엑스사이언티아는 Lead 최적화를 자동화해 개발 기간을 4~5년에서 1년으로 줄였다. 신약 개발이 '찾는 과정'에서 '설계하는 과정'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비임상 단계에서도 AI는 독성·약동학(PK) 예측으로 실패 확률을 낮추고, 머크의 합성 AI 플랫폼은 최적의 공정을 제안한다. 약물 재창출에서도 베네볼런트AI는 바리시티닙의 코로나19 기전을 규명하며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긴급사용승인을 이끌었다.
임상시험 단계의 변화는 더 뚜렷하다. 디지털 트윈은 실제 환자와 짝을 이루는 '가상 환자'를 생성해 대조군 규모를 줄일 수 있다. 언런.AI(Unlearn.AI)는 일부 치매·중추신경계(CNS) 임상에서 대조군을 20~30% 줄이면서도 필요한 통계적 검증력을 유지한 사례가 입증된 바 있다. 이러한 기술이 감염병 치료제처럼 속도가 생명인 분야에 적용된다면 파급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전자의무기록(EHR) 분석과 AI 기반 임상 운영 자동화는 환자 모집부터 CSR 작성까지 개발 전 단계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AI 신약 개발 인프라스트럭처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해 단일 기업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직 블록버스터 신약도, 백신·항바이러스제 개발 경험도 충분하지 않은 한국이 선택해야 할 전략은 명확하다. 정부가 주도하는 '오픈 이노베이션형 AI 신약 플랫폼' 구축이다. 데이터·알고리즘·슈퍼컴퓨팅을 공동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때, 중소 혁신기업도 '범용 항바이러스제'나 'mRNA 백신' 같은 신약 개발을 앞당길 수 있는 '공동의 실험실'을 갖추게 된다. AI 기반 신약 개발 역량을 선점하는 순간, 한국은 다음 팬데믹의 방파제를 넘어 글로벌 신약 강국으로 도약할 발판을 갖게 된다. 이 역량을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가 다가오는 바이오 시대의 주도권을 가르게 될 것이다.
[배병준 현대바이오사이언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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