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1일 인천 송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천천히 서둘러라: 알도 마누치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출판인’ 전시에 알도 마누치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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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아무 일도 없었다. 눈에 띌 만한 사건은 없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의 전환은 그렇게 조용히 진행되었다. 종교 문명에서 세속 문명으로의 대전환이라 평가받은, 이 거대한 변화를 조용하게 추동한 알도 마누치오의 말이다.
‘당신이 누구든, 알도가 여러분께 재차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간단하게 용건만 말씀하시고 가실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헤라클레스가 지친 아틀라스에게 그랬듯이, 제 짐을 짊어지실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당신을 비롯해 저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시킬 일감은 넘쳐나니까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어느 골목에 있던 알도 출판사의 문짝에 걸린 간청이다. 문명의 대전환을 떠올리는 어떤 메시지도 담겨 있지 않다. 글을 고치고 책을 만들어야 하니, 제발 집중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하소연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의 문명사적인 전환이 베네치아의 후미진 뒷골목에 있던 허름한 출판사와 기름으로 찌든 인쇄소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증표이기에 이 간청은 눈에 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의 문명사적인 전환은 힘이 아닌 책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알도였다.
알도는 서양 문명의 성격을 중세의 신본주의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로 전환한 원동력의 비밀이 ‘알고자 하는 욕망’(curiositas)임을 간파했던 인문학자다. 호기심은 세상을 바꾸는 원천이고, 호기심은 사람의 본성이자 새로운 세계와 문명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꿰뚫어 본 사업가였다. 이것이 사실로 증명된 것은 그가 사망하고 난 뒤 먼 훗날이었다. 사람을 바꾸고, 역사와 문명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추동력으로 호기심을 이용할 줄 아는 비즈니스맨이었기에, 알도를 르네상스 시대의 스티브 잡스로 평가할 만하다.
안전한 학자의 길이 아니라 모든 사업적 위험을 감수하고 ‘호기심’이라는 욕망의 전차를 직접 운전하겠다고 나선 사업가의 원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다음달 25일까지 인천 송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리는 기획특별전 ‘천천히 서둘러라: 알도 마누치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출판인’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알도가 남긴 삶의 흔적과 문명이 어떻게 전환되는지를 전하는 역사의 기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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