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1918~19년, 캔버스에 유채, 100 x 64.7 cm,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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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가 홀로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이주한 건 1906년, 20대 초입의 어린 나이였다. 비록 몰락했지만 한때 부유했던 유대인 집안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미술에 매료됐다. 파리에서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반항과 일탈을 훈장처럼 과시하던 몽마르트르를 드나들면서도, 고풍스러운 취향과 정돈된 삶을 유지하고자 했다.
단정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점차 술과 환각제에 의존하게 되었고,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마구잡이로 내팽개치며 ‘더러운 부르주아 시절에 만든 유치한 장신구’라 폄훼했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시대에 르네상스의 유산을 고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발작적인 자기 파괴는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결핵이 악화되며 그의 몸과 정신을 잠식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결핵은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연민과 동시에 기피의 대상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생의 마지막 2년 동안 연인 잔 에뷔테른의 초상만 25점이 넘게 그렸다. 길게 늘어진 얼굴과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 굳게 다문 입술과 영원을 응시하는 듯 투명하고 공허한 눈은 고대 조각처럼 고요하며, 르네상스 회화처럼 안정적이다. 1918년, 따뜻한 남프랑스에서 딸이 태어났을 즈음 그의 건강은 잠시나마 회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20년 그는 세상을 떠났고, 에뷔테른이 곧 뒤를 따랐다. 첫돌을 갓 넘긴 나이에 고아가 된 아이는 훗날 미술사학자가 되어, 기억이 아닌 연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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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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