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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8 (목)

    [기억할 오늘] 진주만 공습 '패장(敗將)'의 오명과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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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7 진주만 공습과 “내가 뭐랬어!(I-Told-You- So!)”- 1

    한국일보

    진주만 공습 당시 하와이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던 허즈번드 키멀 제독의 대령 시절 사진. history.navy.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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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함대의 진주만 공습 당시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E. 키멀(Husband E. Kimmel, 1882~1968) 제독은 피습 직후인 1941년 12월 17일, 판단 착오 및 직무 태만 혐의로 직위 해제와 함께 소장으로 강등당했고 이듬해 3월 퇴역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된 군인 중 한 명이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그는 41년 2월 4성 장군으로 승진하며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됐다. 전임자 제임스 리처드슨(James O. Richardson) 제독이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던 사령부를 하와이 진주만으로 재배치하려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반발하다 해임된 직후였다. 리처드슨은 하와이가 잠재적 적인 일본 해군 작전지역에 인접해 기습공격에 취약하며, 본토와 너무 멀어 비상시 병참 지원 등을 받기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묵살한 그의 우려는 10개월 뒤 굴욕적으로 현실화됐다.

    키멀을 역성드는 진영은 그 유탄에 키멀이 희생됐다고 여긴다. 그들은 대통령과 국방부 고위 당국자들이 일본의 도발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키멀에게 구체적이고 시의적절하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미국의 참전 명분이 필요했던 대통령이 일본의 선제 도발을 유도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물론 키멀의 책임은 컸다. 그는 공습 약 열흘 전 워싱턴D.C. 군 수뇌부의 전쟁 경고 전문을 받고도 소규모 함대 내 사보타주 정도의 도발만 있으리라 판단, 기지 내 함정과 항공기들을 밀집 정렬시킨 뒤 육상 경비만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규모 공중 폭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키멀 측은 워싱턴D.C. 군수뇌부의 경고 전문이 당시엔 통상적이었으며 그 근거가 된 구체적인 첩보는 제공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해임-강등된 당시 하와이 주둔 육군 지휘관 월터 쇼트(Walter Short) 장군은 자신들이 정치의 ‘희생양’이 됐다며 숨질 때까지 명예 회복을 호소했다.(계속)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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