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8일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앞두고, 민주노총과 이주노조 등 노동단체가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 모여 전국이주노동자대회를 열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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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이른 새벽, 어슴푸레 윤곽이 드러나는 지방의 소도시. 국밥집도 문 열기 전인 그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편의점에 들렀다. 캔커피 하나 계산하고 편의점 문 앞에 서서 쭉 들이켜고 나니 비로소 주변을 둘러본다. 곳곳이 웅성거리며 제법 복작거렸다. 연수를 위해 머무르고 있는 동네, 연고도 없었다. 낮에는 한적해 보였고,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으레 그렇듯 지나는 뜨내기가 보기에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런 동네였건만, 새벽의 도시는 낮의 무기력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북적이고 있다. 텅 빈 줄 알았던 빌라 앞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기다렸다는 듯 승합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하는 사람들. 살펴보니 빠짐없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어떤 노동은 은폐되어 있다. 이맘때면 신나게 먹는 굴도 이주노동자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상에 오를 수 없다. 홍대 입구 줄 서서 먹는 방어집, 겨울이면 호황을 이루는 수산시장의 제철 맞은 겨울 모둠회, 꾸덕하니 기름진 과메기. 김장철에 담갔다가 이제쯤 꺼내 먹는 배추김치, 무김치. 밥상에 오르는 모든 ‘국내산’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거쳤다. 식재료에는 국적이 있는지 몰라도, 더는 노동에는 국적이 없다.
2020년,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헹’은 난방도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을 청하다 숨져야 했다. 영하 20도의 한파,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향년 31이었다. 2025년 10월28일, 대구 성서공단에서 단속을 피해 실외기 창고 안쪽에 숨어 있던 ‘뚜안’은 추락으로 우리 곁을 떠나야 했다. 향년 25.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였다. “너무 무서워, 숨쉬기 힘들어.”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카톡이었다. 노동에는 사연이 많다. 미등록이라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이다. 이 땅의 필요 때문에 존재하는 노동에 제도가 미비해 이름이 붙어 있지 않으니 ‘미등록’이다. 그러니 이 땅의 노동에 국적을 묻지 말라. 그 노동을 거치며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된다.
늘 어떤 노동은 은폐되어 있었다. 밥상머리 앉아 있으면 아침, 점심, 저녁이 떡하니 차려지는 줄 알았던 시절도 그리 옛날이 아니다. 서울 어딘가에서 클릭 한번으로 도착하는 음식도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다 어떤 노동으로 빚어졌다. 그 노동이 보이게 되기까지 지워지고 잃어버린 이름들이 있었다. 가사노동이 비로소 보이게 되기까지, 자영업자와 배달업무가 노동으로 불리며 존중받게 되기까지 걸렸던 시간들. 일상을 지탱하는 힘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우리 사회는 오래 걸려서야 배울 수 있었고,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오늘도 어떤 노동이 있다. 굴막에 쪼그려 앉아 굴을 까는 사람들, 어업 나가 방어며 고등어며 끌어 올리는 사람들. 쌀·나물·과일, 철 따라 유행 따라 이 땅의 밥상을 낸다며 온몸을 갈아 넣는 사람들.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논과 밭에서 소비의 욕망과 벌이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 노동에 적당한 이름이 붙지 않아 ‘불법’이라 불리는 것은 우리의 미비함일 뿐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지난 14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을 앞두고 만국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직종도, 인종도, 출신 국가도 모두 다른 그이들을 묶는 하나의 공통점은 ‘한국의 노동자’라는 엄연한 사실 하나다. 뚜안의 분향소 앞에서 노동자들이 외쳤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내란 종식 그날까지, 다시 빛의 혁명 ▶스토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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