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신청 막으며 합의서 작성 종용
유가족 동원해 노조, 언론 접근 막아
CCTV 숨기고 사건내역도 안 보여줘
김범석 의장, 산재 은폐 직접 지시 의혹도
15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 김범석 쿠팡 의장에게 개인정보 유출과 노동자 산재 사고 등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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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업체에 A씨 일이 알려지면 안 됩니다. 쿠팡에서 이번 일 안 새어 나가게 해달라고 하네요.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진 쿠팡노동자 A씨가 일했던 쿠팡대리점 관계자
노동자 사망 사고가 잇달아 벌어진 쿠팡이 유족을 회유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산재를 신청해도 인정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며 합의를 종용하거나 유족이 과로사 문제를 취재하는 언론에 보도하지 말 것을 요구하도록 하는 식이었다. CCTV 등 자료를 유족에게 공유하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18일 쿠팡의 산재 은폐 시도 사례를 발표했다. 우선 유족들에게 합의서 작성을 종용하거나 산재 신청을 못하도록 막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예컨대 지난해 5월 28일, 쿠팡 퀵플렉스 야간 배송기사 고 정슬기씨가 퇴근 후 자택에 숨졌다. 당시 정씨는 하루 평균 10시간 30분, 주 6일 이상 야간 배송을 했다. 사망 전 12주 동안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은 73시간 21분에 달했고 사인은 과로사(심실세동과 심근경색 등 심혈관계 질환)였다.
유족이 장례식을 마치고 김씨가 소속됐던 쿠팡 대리점을 방문하자 대리점 대표는 합의금을 제시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유가족이 산재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합의서 작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리점 대표는 "제가 유가족이면 산재를 안 한다. 기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확실히 (산재 인정이) 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상관없는데 노무사 세 명이 좋지 않다고 나오니까"라고 말했다. '산재 신청이 어려울 것'이라는 취지의 왜곡 정보를 흘리며 합의서 작성을 종용한 셈이다. 산재신청이 이뤄지지 않으면 사고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산재 은폐에 유가족까지 동원
지난해 5월 숨진 쿠팡 배송노동자 고(故) 정슬기씨가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직원과 나눈 대화 갈무리.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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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로 가족을 잃은 유족을 사건 무마에 동원하는 행태도 보였다. 지난해 7월 새벽배송 노동자인 A씨가 집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숨졌는데 택배노조가 피해자와 접촉하자 쿠팡 측에서 유가족에게 합의금을 크게 올려 제시했고, 유족이 노조에 대신 사과하며 사건화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지난해 7월 18일에는 쿠팡 제주 서브허브캠프에서 분류작업자가 갑자기 쓰러진 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2시간 만에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언론사가 사측에 사실관계 확인을 요구하자 유족이 연락을 해와 취재 중단을 요구했다. 올해 8월 12일에는 경기 안성시에서 배송업무를 하던 쿠팡 주간 택배노동자가 배송 도중 쓰러져 숨졌는데 이때도 유가족이 취재하던 언론사에 연락해 보도 중지를 요청했다.
산재 사고 발생 시 폐쇄회로(CC)TV 등 영상물이나 사건내역을 피해자 가족에게도 공개하지 말도록 강제했다. 2020년 10월 12일 숨진 쿠팡 칠곡물류센터 야간노동자 고 장덕준씨의 사망 이후 유족은 쿠팡을 상대로 고인의 평소 업무 모습이 담긴 CCTV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날 대책위는 산재 발생 시 적용되는 '쿠팡의 비상대응 매뉴얼'도 공개했다. 주목할 지점은 '우호적인 소통 채널 형성', '병원 주변 동향(기자, 노조)을 파악해 관련 부서에 전달', '외부 노조 단체의 개입 동향을 파악하고 내부에 전파', '노동단체의 집회 및 시위정보 파악' 등이다. 모두 사건의 확산과 외부 유출을 막아 은폐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대책위는 "쿠팡의 산재대응매뉴얼은 유족을 고립시키고 노조와 언론 등의 접근을 막고 대관팀을 이용해 정부와 국회까지 접근을 못하도록 했다"며 "특히 쿠팡은 유족과의 합의를 통해 노동자 사망의 책임소재에서 자신들을 배제시키고 유족들로 하여금 산재 사망사고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김범석 쿠팡 의장이 지난 2020년 발생한 장덕준씨 사망 사고와 관련, 내부에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도록 확실히 하라"고 지시한 것이 드러난 것과 관련해 "형법상 증거인멸 교사죄, 산안법상 산업재해 은폐죄 및 원인조사 방해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김 의장의 행위는 단순히 자신의 방어권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 사용자로서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타인을 범죄에 가담시키고 국가의 형사사법 작용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라고 평가했다.
송주용 기자 juy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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