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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지금, 여기]12월22일, 남태령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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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로부터 1년 전인 2024년 12월22일, 나는 남태령 고개에 있었다. 전날 저녁 농민단체들이 결성한 전봉준 투쟁단이 트랙터를 몰고 행진하다 남태령역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는 사실이 SNS를 통해 전해졌다.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하나둘 남태령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유튜브를 통해 현장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새벽을 지나 지하철 운행이 재개되자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아침에 남태령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리에는 수천명의 시민이 길에 앉아 있었다.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 뒤로는 응원봉을 든 수많은 여성이 있었고,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도 곳곳에 휘날렸다.

    현장에 만들어진 발언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발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각자의 삶의 경험과 사회에 대한 요구가 쏟아질 때마다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22일 오후, 마침내 차벽이 해제되며 트랙터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까지 행진했다.

    후일 ‘남태령 대첩’이라고 불리게 된 이날의 사건은 4개월여 이어진 탄핵 집회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그 여파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함께 연대하고 승리했다는 자신감을 얻은 시민들은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투쟁에도 후원과 연대로 함께하기 시작했다. 지난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의날을 맞아 보신각에서 열린 민중의 행진에서도, 남태령에서 만났던 깃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어째서 남태령 대첩의 기억은 그토록 강력하게 남았고 이후의 연대로까지 이어졌는가. 그건 바로 당시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함께한다는 감각이 무엇인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이주민, 도시 빈민, 농민, 장애인 등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모두가 서로를 지켜주고 차벽을 넘고자 하는 같은 마음을 가진 동료였다. 동시에 그곳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 다름이 존중받는,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내도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광장은 닫혔고 노동자와 소수자들은 다시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광장의 주역이었던 2030 여성들은 대선 과정에서 끝내 호명되지 못했다. 고진수 세종호텔 지부장은 300일째 고공에 머물러 있고, 노동자가 노조 조끼를 입었다는 이유로 백화점 출입을 거부당했다.

    단속에 쫓기던 베트남 이주노동자 뚜안은 추락사했지만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거리와 이주아동이 다니는 학교 앞에서는 혐중 집회가 계속되고,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는 또다시 폐지됐다. 전국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지자체의 방해도 계속됐고, 인권을 말해야 할 국가인권위원장은 성차별과 성소수자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광장에서 수없이 외쳐졌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아직 국회에 발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강조해온 민생과 통합을 위해서도 차별과 혐오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필수적이지만, ‘먹고사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 앞에서 차별금지법은 또다시 뒤로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이 실망스럽지만 그렇다고 절망을 느끼지는 않는다. 1년 전 오늘 서로가 다름을 인지하면서도 함께 연대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광장에 섰던 모든 이들이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바란다. 그 기억이 이어지는 한 성평등이 실현되고, 노동권이 보장되며, 사회적 소수자가 존엄을 누리는 사회와 장애인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나이가 어리고 출신 국가와 인종이 다르다고 혐오와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 누구나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성별에 상관없이 가족으로서 돌볼 수 있는 사회, 평등을 위한 기본법이 있는 사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경향신문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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