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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나 | 교사·‘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저자
나는 내 책과 관련해서 지난 2년여간 전국의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 단일 직업군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교사였다. 교육청 연수의 일환으로 온 분들부터 도서관에서 하는 시민 강좌까지. 강의가 끝나면 선생님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공교육의 역할을 강조하셨는데, 교실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현장의 절망감과 피로가 그대로 전해져 먹먹해진다. 사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나도 학부모로부터, 종종 학생에게, 심지어 관리자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항의나 요청을 많이 받았다. 교실 안에서 무기력과 냉소를 마주하거나 경쟁으로 퀭한 눈을 바라보면 모든 힘이 빠져 퇴근 시간만 기다리게 된다. ‘거꾸로 캠퍼스’의 정찬필 이사장은 교사가 다양한 여가활동을 하는 건 학교에서 직업적 효능감을 얻지 못해서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했다.
그런데 교실 곳곳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는 책이 나왔다. 최현희 선생님이 쓴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이다. 최 선생님은 페미니즘 교육을 한다고 항의받았고, 우울증과 암을 앓아 잠시 학교를 쉬었다가, 복직 후의 교단일지를 책으로 발간했다. 그는 ‘교육언론 창’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 묘사되는 아이들의 잔인함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저걸 보고 싶구나. 저걸 보는 것을 선택했구나. 그럴 수도 있고, 일부는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른 걸 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믿을 수 없게 잔인해지기도 하지만, 또 믿을 수 없게 빠르게 변화하고 빠르게 배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더 좋은 걸 택하고자 하는 열망은 어른들이 흔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굳건하다. 교사가 교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그런 마음과 가능성을 밀어주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의 문제는 복잡하고 어렵다.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라도 일방적으로 적용하면 그놈의 ‘아륀지’ 꼴이 난다. 언론에 나오는 자극적인 사건들 뒤에 가려진 채, 교사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마음들은 훨씬 많고, 성장하고 싶어 하는 열망은 넘쳐난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 진행한 모둠 수업은 역대급으로 ‘엉망진창’이었는데(내 수업은 종종 그렇다.) 내가 기운이 빠져서 멍하게 앉아 있으니 학생 3명이 다가왔다. “선생님, 힘드셨죠? 그래도 오늘 자는 애는 1명도 없었잖아요. 애들이 다 뭔가는 열심히 했어요.” 난 다시금 쉽고 빨리 절망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짚어주는 학생들에게 매번 배웠다.
교사는 99개의 절망 안에서 구석에 숨어 있는 1개의 희망을 발견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혼자서는 어렵다. 동료와 얘기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교실을 지켜주고자 하는 시민들과 연대하고, 여전히 교사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망울과 만나야 한다. “굳이 왜?”라고 질문하는 교사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직업이 갖는 사회적 가치에 만족할수록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교사가 개인적으로 충만함을 느끼고, 사회적으로도 소명 의식을 가지면 결국 우리 사회를 윤택하게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교사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하고, 마음의 근육을 길러야 한다. 혼자서 행복한 게 아니라 서로 도와가며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껏 공교육은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지탄받아왔다. 하지만 나는 단연코 교사들이 큰 소리 내지 않고 현장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은 이 나라에서 학생들이 그나마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지럽고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혼란 속에서, 지금도 고군분투하며 밑바닥까지 소진되고 있는 교사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말씀을 전한다. 우리가 힘을 내지 않고, 희망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아수라장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 옆에 누가 있어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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