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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요즘 기업 모이면 환율 얘기만"…자칫하면 수천억원 날릴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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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년은 버텨도, 그 이후는 막막합니다. "

    최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국내 10대 그룹의 고위 임원은 가치가 뚝뚝 떨어지는 원화를 두고 힘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아무리 환헤지(사전에 정한 가격으로 달러를 팔아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이는 방식)를 잘해도 매출이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으면 투자 비용은 결국 손실로 쌓인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지난 23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달러·원 환율이 나타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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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어난 대미투자…‘팔려야 산다’



    달러당 원화 가치가 1480원을 넘나들면서 업종을 가리지 않고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통상 수출기업은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가격 경쟁력이 생겨 매출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최근엔 상황이 다르다. 대미 투자 부담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배터리 3사다. 올해 LG에너지솔루션은 1~9월까지 미국 미시간·애리조나 공장 건설에 7조9545억원을 투자했고, 삼성SDI는 인디애나 공장에 2조3421억원, SK온은 테네시·조지아 지역에 1조8878억원을 투자했다. 주로 미국에서 배터리를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투자하는 구조지만, 부족하면 ‘달러빚’을 더 내야한다. 전기차든, 에너지저장장치(ESS)든 잘 팔려야 투자도 성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배터리 업계는 여전히 전기차 캐즘(수요 둔화)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렇다보니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11월 사업보고서에서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5345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일정한 환율로 외화를 사고파는 통화선도 계약 등 환헤지 전략을 통해 실제로는 2367억원 수준의 이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각주를 달았다.

    조선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직접 ‘좋은 회사’라고 언급했던 한화는 필라델피아 해군 조선소에 50억 달러(약 7조4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조선 분야에서 미국 내 입지를 넓히겠다는 전략이지만, 장기 수요가 맞물리지 않을 경우 투자 회수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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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별장에서 '황금함대' 구축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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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품이나 인력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수출 기업들 역시 원화 약세는 원가 부담으로 직결된다. 삼성전자 모바일경험(MX) 사업부는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솔루션 상당량을 미국 퀄컴 등에서 조달하고 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지난해 AP 솔루션 구매액은 10조9326억원에 달했으며, 관련 구매 비용은 전년 대비 약 7% 상승한 것으로 명시됐다.

    제약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임상 시험 비용과 환자 모집 비용 등 연구개발(R&D) 관련 지출의 상당 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하다보니 환율이 오르면 지출이 훨씬 커진다”고 말했다.



    항공·내수 업종 직격,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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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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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출을 원화로 일으키는 업종은 원화 하락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항공업계는 항공기 대여료와 유류비 등 주요 비용을 달러로 지급하는 구조여서 원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대한항공은 올해 1분기 역대 최고 매출(3조9559억원)을 기록했지만, 원화값이 떨어져 버는 돈(영업이익)은 지난해에 비해 19% 줄었다.

    원재료를 해외에서 들여와 국내에 판매하는 기업들의 사정은 더 어렵다. 커피 판매업체 대표 A씨는 “신년 사업 구상 회의에서도 ‘어떻게든 비용을 줄이자’는 말만 나왔다”며 “원두 가격이 100원 이상 뛰었는데 소비자 가격을 올릴 수 없어 딜레마”라고 털어놨다. 화장품 제조업체인 B사 관계자도 “계면활성제나 유럽산 색조 유화제 등 원료를 전부 달러로 사오다 보니 환율 부담이 그대로 원가에 반영된다”며 “지난해보다 많게는 수익성이 10% 가까이 떨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정책본부장은 "특히 대기업에 납품하는 2차 협력업체들은 모이기만 하면 높은 환율 얘기부터 꺼낸다"며 "중소 협력업체에 원화값 하락은 더욱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의 수출 전략이 가격 경쟁에서 기술 경쟁으로 전환되면서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매출 증대 효과는 과거보다 크게 약화됐다”며 “관세 등 글로벌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원화 하락이 곧바로 수출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롯데마트는 환율 변동이 매입가에 빠르게 반영되는 연어의 가격 변동 폭을 낮추려 칠레에 지정 양식장을 계약해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이마트도 아일랜드산 소고기 수입처를 발굴해 미국산, 호주산 외에도 육우 확보 산지를 확대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전통적인 환헤지(환율변동 위험회피)는 물론, 수출해 벌어들이는 외화로 주요 원료를 사들이는 이른바 ‘내추럴 헤지’를 통해 환율 변동 영향을 최소화하려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수민·노유림·박영우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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