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표(禁標)란 어떤 행위를 금지하는 표지(標識), 푯말이다.
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의 『한국의 금표』에 의하면 송금(松禁)·금산(禁山)·봉산(封山) 등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산림 관련 금표가 가장 많고, 태실 보호 등 왕실 관련 금표, 사찰 관련 금표, 제단·신앙 관련 금표 그리고 행위 금지를 나타내는 금표 등으로 대별하고 있다.
그의 책에 수록한 금표는 78개에 이르고 충북지역에는 6개가 있으니 ▷청주 월리사 폐단금비 ▷보은 법주사 봉교비 ▷보은 순조태실 금표 ▷보은 순조태실 화소 ▷충주 미륵리 봉산 표석 ▷음성 대장리 금표 등이다.
이 글에서는 사찰 관련 금표 2개 중 먼저 1825년에 세운 '청주 월리사 폐단금비'부터 살펴보자.
현재 월리사 초입에는 이구당 부도, 월리사 사적비 그리고 월리사 폐단금비가 나란히 서 있다.
월리사 폐단금비는 전체높이 141.3cm, 비신높이 105.0cm, 너비 52.7cm, 두께 20.0cm 크기다.
'국가유산 지식이음'에 게재된 판독문과 해석문(강민식 박사)은 아래와 같다.
<판독문> (앞면) 忠淸左道文義縣九龍山月裡寺局內雜役 獘斷禁碑 此寺本以三韓古景仰伩釋非但佛▨▨ 三聖殿牌同榻侍衛則與他別區▨▨ 論大小人不敢入葬作獘永世立表▨▨ 道光五年乙酉四月日記 (뒷면) 各䖏佛粮田畓隱失許多有名田畓賭不勤宲故都▨ 於本邑南面則日後各施▨▨入居僧徒以此憑攷▨ 韓喆徵夙字畓二斗 韓守▨夙字畓三斗 姜士玄聽字田十斗 李▨▨夙字畓三斗 ▨明▨▨字田八斗 崔時▨夙字畓三斗 鄭夏▨▨字田十斗 金夏成禍字田三斗 <해석문> (앞면) 충청좌도(忠淸左道) 문의현(文義縣) 구룡산(九龍山) 월리사(月裡寺)의 국내(局內) 잡역(雜役) 폐단(弊斷)을 금하는 비(碑).
이 절은 본래 삼한(三韓)에서 예로부터 우러르던[景仰] … 으로 단지 불존(佛尊)만이 아니라 삼성(三聖)의 전패(殿牌)와 동탑(同榻) 시위(侍衛)는 다른 곳과 구별되는 곳이다.
대인과 소인을 막론하고 감히 들어와 장사지내고 폐단을 일삼지 말라고 영원히 표를 세운다.
도광(道光) 5년 을유(乙酉, 1825년, 순조 25) 4월 모일 쓰다.
(뒷면) 각처의 불량(佛糧) 전답(田畓)은 잃은 것이 허다하다.
이름 있는 전답의 도지는 없애거나 감추지 않으니 고로 모두는 본 고을의 남면(南面)에 … 있은 즉 뒷날 각 시주자는 … 들어와 사는 승도(僧徒)는 이로써 근거하여 살필 일이다.
한철징(韓喆徵) 숙자(夙字) 논[畓] 두 말[二斗]….
한수업(韓守業) 숙자 논 서 말[三斗]….
강사립(姜士立) 총자(聰字) 밭[田] 열두 말[十斗] 두[二]… 이▨▨(李▨▨) 완자(宛字) 논 서 말[三斗]….
▨명윤(□明允) ▨자(▨字) 밭 여덟 말[八斗]….
최시▨(崔時▨) 숙자 논 서 말[三斗]….
정하상(鄭夏相) 화자(禍字) 밭 열 말[十斗] 넉[四]….
김하성(金夏成) 화자 밭 서 말[三斗]….
이상에서 살펴 본 월리사 폐단금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절은 본래 삼한 옛날부터 우러르던 유서 깊은 사찰로서 단지 불존 뿐만 아니라 삼성과 전패를 같은 자리에 모신즉슨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별한 곳, 부처님과 임금님을 같은 위치에 모셨으니 신성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하니 누구든지 감히 이곳에다가 장사(葬事, 죽은 사람을 땅에 묻거나 화장하는 일)를 지내거나 폐단(弊端, 옳지 못하거나 해로운 일이나 행동)을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다.
뒷면에는 불량전답(佛糧田畓,부처에게 올리는 쌀을 생산하는, 절에 딸린 논밭)은 잃은 것이 허다한데 명단이 있는 논밭의 도지(賭地,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짓고 지불하는 사용료)는 이를 근거로 하여 제대로 확보하라는 당부라 여겨지며 명단은 성명과 자호(숙자·총자·완자·화자 등은 자호(字號)라고 하는데, 연속된 개별 필지를 5결 면적 단위로 묶어서 천자문 1자씩 부여했다.
조선시대 토지대장에 천자문의 각 글자가 필지의 면적과 위치를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됐다) 그리고 도지로서 곡식의 양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사찰에 무덤을 조성하는 것을 금지한 금표는 월리사 폐단금비 외에도 ▷안동 봉정사 금혈비(禁穴碑) ▷사천 다솔사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標) ▷제주 애월리 금장비(禁葬碑) ▷제주 곽지리 동중 금장(洞中 禁葬)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금장비를 세운 까닭은 풍수지리에 의한 명당에 집착했던 풍습, 시대적 상황과 관련 있다.
조상의 묘를 명당에 모시어 발복, 복을 받으려는 믿음 때문에 마을 인근이나 사찰경내까지 들어오는 무덤을 막아내려는 목적으로 금장비를 세우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월리사 금표는 금장(禁葬) 외에도 잡역 폐단을 금하라는 것과 뒷면에 적힌 전답 내역이 독특하다.
당시 사찰이 종이, 숯, 신발 등을 만들어 관청에 바쳐야 하는 잡역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왕의 권위를 다 내세우면서까지 관원 등 대소인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했을까 싶다.
이와 더불어 뒷면에 적은 것은 절에 딸린 전답이 숨겨지거나 잃어버린 것이 허다하지만 명단에 있는 전답은 없애거나 감춰지지 않도록 고을의 남면에 있으니 잘 챙기라는 취지로 보인다.
다양한 금표 중 월리사 폐단금비를 통해 조선후기 사찰이 겪는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월리사 금표는 다른 사찰 금표와 비교했을 때 성역 보존과 함께 토지대장 기록과 도지 관리 등을 동시에 담은 복합적 문서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는 조선 후기 지방 사찰이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지역 사회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국가 또는 지방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례가 극히 드문 것은 어인 까닭인가.
나란히 서 있는 이구당 부도와 월리사 사적비는 각각 청주시 향토유형유산으로 등재돼 있음에도 역사 문화적 가치가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은 월리사 폐단금비는 문화유산 등재가 되지 않은 까닭을 모르겠다.
1825년 건립… "사찰 경내 장사·잡역 폐단 금지" 경고문충청좌도 문의현 구룡산 월리사 배경으로 세워진 금표불량전답 내역과 도지 확보 당부까지 새긴 이례적 구성동일 경내 유산은 향토유형유산, 해당 금비는 등재 안돼지방 사찰사 연구 자료로 지속적 보존 필요성 목소리 금표,월리사폐단금비,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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