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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6 (목)

    [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55] 혁명의 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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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20년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가 붉은 낙서로 뒤덮여 있다. 묘비 측면에 ‘증오의 교리(Doctrine of Hate)’라는 문구가 적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1848년 2월 26일, 나는 런던 시내를 서성인다. 이틀 전인 24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이 최초로 발표됐다고 ‘회자된다.’ 인쇄소에서 23쪽 분량의 책자로 처음 발간된 것은 1848년 2월 21일 런던에서의 독일어판이었다. 바로 다음 날 프랑스 파리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24일 루이 필리프 국왕이 폐위되었기에 묘한 상징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우연한 일치에 드라마틱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공산당 선언’의 발표일을 ‘통상’ 24일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여러 나라에서 추방당했는데, 이 자본주의 최대의 적을 자본주의가 가장 성황이던 영국에서 받아들여준 덕에 그가 대영박물관 도서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쓸 수 있었으며 영국에서 ‘공산당 선언’의 최초본이 인쇄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여러 반정부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등으로 구성된 이 책자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 이미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특히 소련 몰락 전까지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된 정치 문건으로서 냉전 시기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공산주의 강령을 넘어서 이른바 고전이 된 것인데, 어차피 의미 있는 책이란 권하는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인간을 밝게 만들지 못한다. 인간과 세상의 다양함과 어둠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읽고, 이겨내는(소화시키는) 것까지가 진정한 독서다. 그런 면에서 ‘공산당 선언’은 읽을 만한 사료(史料)이며 정치 선동 팸플릿으로 훌륭한 모범이다. 혁명성은 ‘불온성’이고, 이 불온함이 낭만적 에너지로 전환돼 대중을 움직인다. 한데 혁명은 ‘여름날 생선’처럼 상하기 쉽다. 불온해서 싱싱할 때 먹어 치우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인이 된 혁명가들은 썩은 생선 더미 속에서 제 시신(屍身)이 썩어 가는지도 모르고 산다.

    [이응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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