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이 바닥을 긁으며 끌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린다. 형틀 위에서 채찍이 떨어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비명이 없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표정이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이 목숨을 건 싸움이라는 사실을.
그 가운데 성삼문의 모습이 유난히 또렷하다. 영화는 그가 마지막 길로 끌려가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몸은 쇠사슬에 묶여 사형장으로 향하지만 그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강원도 영월의 산과 강이다. 그곳에는 폐위된 왕 단종이 있었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시를 남긴다. 그 시 속에는 영월의 봉래산과 어린 왕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몸은 형장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왕의 곁에 있었다. 권력의 칼날 앞에서도 충심은 꺾이지 않았다.
영화는 그 장면을 통해 묻는다. 인간에게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조선 역사에서 계유정난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왕조의 정치 질서와 인간의 도리를 동시에 뒤흔든 사건이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권력을 장악했고 결국 왕위에 올랐다. 어린 임금 단종은 왕좌에서 밀려났고 상왕이 되었으며, 마침내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권력을 떠난 자리에서 도리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삶 또한 정의와 충절의 역사다.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곽도였다.
곽도는 단종 시대의 도승지였다. 도승지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고 국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자리였다. 오늘날의 국가 체계로 비유한다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위치였다. 그는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세조로 즉위하자 그는 벼슬을 내려놓았다. 그에게 관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왕이 없는 궁궐에서 권력을 섬기는 일은 그의 도리에 맞지 않았다.
그는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산속의 은둔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다시 비보가 전해졌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강등되었다는 이야기였다.그 소식은 그의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왕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시대가 무너졌다는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더 이상 한양을 바라보며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솔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전북 임실 오수면의 작은 산 하나를 만난다. 이름이 ‘노산’이었다. 그 순간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단종의 군호가 바로 노산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산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 집을 짓고 남은 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집은 북향으로 지었다. 일반적인 풍수와는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북쪽에는 영월이 있었고, 영월에는 폐위된 왕 단종이 있었다. 그는 북쪽을 향해 살았다. 노산을 바라보며 오직 충절로 살았다. 하루하루가 단종을 향한 마음의 의식이었다. 그의 삶은 말없는 충절이었다.
곽도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네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경기도 적성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다시 남쪽으로 이어졌다. 넷째 아들 곽득형이 전남 곡성의 현감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지방 수령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잘못된 정권 아래에서 관직을 이어가는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단종(노산군)과 아버지의 혼이 깃든 임실 오수면 노산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살았던 그 산 아래였다. 그는 임실군 오수면 주천리에 집을 짓고 가문을 이루었다. 그때부터 현풍곽씨 곡성공파는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노산을 바라보며 세월을 보냈고 선비의 삶을 이어갔다.
노산은 단종을 상징하는 산이었고 주천은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었다. 주천(酒泉)은 ‘술이 솟는 샘’이라는 뜻이다. 중국 고사에서 은둔한 선비의 삶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공교롭게도 강원도 영월에도 같은 이름의 주천이 있다.지명은 때로 역사의 마음을 담는다.
임실 노산 아래 주천리의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출세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전주와 남원에서는 과거 급제자가 거의 백 명 가까이 나왔다. 그러나 임실에서는 그런 숫자를 찾아보기 어렵다.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곳의 선비들은 벼슬보다 명분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역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향촌에서 학문을 나누며 살았다. 출세의 길 대신 공동체 속 충절의 삶을 택했다. 역사서에는 크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정신이었다.
그래서 임실 노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그곳은 조선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상징이다. 오늘날 강원도 영월에는 단종의 능 장릉이 있고, 청령포에는 유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종대왕을 기리는 비석도 인근 태백산에 세워져 있다. 그것은 역사적 기억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임실 노산 아래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곳은 기념물이 아니라 삶이 이어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한 가문이 같은 마음으로 노산을 바라보며 살았다. 권력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 했던 삶의 역사였다.영화는 상영이 끝나면 스크린이 내려온다. 그러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노산 아래에서 이어져 온 선비의 삶은 지금도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건다.
"권력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인간의 도리는 바뀌지 않는다."
성삼문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시처럼, 그리고 임실 노산 아래에서 평생을 살았던 곽도의 삶처럼, 역사는 결국 인간의 선택으로 남는다.그래서 우리는 단종의 비극을 단지 옛 왕조의 사건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권력과 양심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지금도 임실의 노산은 그 질문을 품고 서 있다. 그리고 그 산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우리에게 말한다.
"정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침묵 속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기억을 다시 이어야 한다. 강원도 영월에서 시작된 단종의 비극의 역사와 전라북도 임실 노산 아래에서 이어진 선비의 충절의 역사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한 왕의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 앞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왕과사는 남자 영화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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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아브라함 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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