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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7 (토)

    [에디터의 창]단종의 밥상,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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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항준 감독이 방송에서 보여준 유쾌한 입담과 인간미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 <라이터를 켜라> <불어라 봄바람>은 웃음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명랑만화 같아, 감독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2023년 작품 <리바운드>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잘 만든 상업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흥행감독’도 아니었고, ‘거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를 제외하면 뚜렷한 흥행작도 없었으며, 작품들에 대한 호불호도 갈렸다. 그래서 그가 비운의 왕 단종의 생애 마지막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내놓았을 때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한 달 만에 ‘천만영화’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평단의 반응이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흥행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넷플릭스 등 OTT 범람으로 200만~300만의 관객을 모으기도 벅찬 영화계와 극장의 어려운 사정 등을 감안하면 경이롭다고 할 만한 성취다.

    대체 어떤 요인이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일까. 관객 700만명대였던 지난 주말 뒤늦게 봤다. 볼만했지만, 수작이라고 부르기엔 망설여졌다. 만약 기자에게 영화평이 맡겨진다면 대략 이런 기조로 쓸 것 같다. ‘단종(박지훈)과 엄흥도(유해진)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빌드업이 충분치 않고, 조연급들에 대한 묘사는 빈약하다. 급작스럽게 이야기가 결말로 치닫지만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산만한 극의 멱살을 잡아끌고 간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왜 열광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마음을 움직였다. 예컨대 유배 초반 식음을 전폐하던 단종이 광천골 사람들과 교감하며 기운을 차리는 과정이 그랬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과 한 상에서 밥을 먹으며 이들의 애환을 듣고, 백성들이 만든 음식을 칭찬하고, 마을 청년에게는 글을 가르치는 임금.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호랑이에 맞서 “네 상대는 나다”라고 외치며 백성을 지키려는 단종의 모습에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신과 부인을 지키기 위해 내란까지 일으켰던 전직 대통령에 질린 관객들은 영화 속 단종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꼈을 법하다.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단종) “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엄흥도) “그대는 아닌가.”(단종) 극장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거장 박찬욱 감독은 “증오와 분열의 시대에,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행위가 마음을 움직이고 보편적인 연대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는데, 이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을 보면서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 <명량>(2014)을 떠올렸다. <명량>은 해상전투 장면 등 압도적 규모에 비해 평면적 인물, 빈약한 서사 등으로 호불호가 갈렸지만 1700만명 관객 동원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세웠다. 완성도를 넘어, 관객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세월호 침몰 사건 당시 절체절명의 7시간 동안 부재했던 대통령,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한 국가시스템 등에 분노했던 사람들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건 영화 속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은 듯했다.

    대작들과 동일 비교는 어렵겠지만 14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예상외로 흥행한 <신의악단>을 보면서도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티켓파워 떨어지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촌스러운 만듦새의 저예산 선교영화로 치부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 이를테면 중장년층에게는 다르게 보여졌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기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최근 발간된 <한국영화가 꿈꾼 복수들>에는 “대중영화는 단지 영화적 스토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스토리가 동시대 관객들의 집단무의식과 공명해야 큰 흥행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동의한다. ‘집단무의식과 공명한다’는 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이 아닐까.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천만영화라는 신드롬급 인기를 결정짓는 마지막 한 끗은 공감을 얻는 것이다.

    어디 영화뿐이겠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일 터다. 증오와 분열의 언어가 넘쳐날수록 타인의 감정과 공명하는 경험은 더 절실해진다. 논리와 이성이 우선하는 시대라지만,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인간적 따뜻함은 그 이상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경향신문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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