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경비원·학생…평범한 일상으로 국민 감성 자극
누적 판매 500억개·매출 8조원…'정'은 현재진행형
그래픽=비즈워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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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광고]는 우리나라 식품유통업계의 광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광고들을 소개하고 그 뒷 이야기들을 펼쳐보는 콘텐츠입니다. 꼴찌 브랜드를 단숨에 1위로 만든 '최고의 광고'부터 잘 나가던 브랜드의 몰락을 불러온 '최악의 광고'까지, '광고의 정석'부터 '광고계의 이단아'까지. 우리의 인상에 남았던 여러 광고 이야기를 나눠 볼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추억의 광고는 뭔가요? 혹시 이 광고 아닌가요.[편집자]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요.
감미로운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한 소녀가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본다. 깜깜한 밤인데도 정원에서는 와이셔츠 차림의 중년 남성이 굳은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소녀는 조용히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서재로 향한다. 서류가 쌓인 책상 위에 초코파이 하나와 '아빠 힘내세요'라고 적힌 쪽지를 살며시 올려두고 자리를 피한다. 잠시 후 서재로 돌아온 아버지가 쪽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다. 소녀는 문틈으로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따라 웃는다. 딸이 아버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주무르는 장면과 함께 내레이션이 흐른다. '마음을 나눠요, 오리온 초코파이.'
이 장면은 1992년 오리온 초코파이 '정(情)' 광고의 한 편입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이 캠페인은 집배원·경비원·간이역 역무원 같은 평범한 인물들이 말 없이 마음을 전하는 장면들로 채워졌습니다. 국내 최초로 '제품'이 아니라 '감성'을 전면에 내세운 시도였죠.
위기에서 태어난 '정'
오리온 초코파이의 시작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리온의 모태인 동양제과 연구원들이 해외 출장 중 초콜릿 코팅 과자를 맛본 뒤 아이디어를 얻어 2년여의 개발 끝에 내놓은 제품이었습니다. 비스킷과 마시멜로, 초콜릿을 결합한 이 낯선 과자는 출시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초코파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경쟁사들도 앞다퉈 유사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리온은 경쟁사들의 '초코파이' 상표 등록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는데요. 법원은 초코파이가 해당 과자류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라면서 오리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국내 원조 초코파이의 명성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의 매출은 반토막이 날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죠.
이때 등장한 것은 1989년 '정(情) 캠페인'입니다. 오리온은 제품의 맛과 성분을 강조하는 기존 광고 방식을 버리고 소비자의 감성을 파고드는 방향으로 선회했는데요. 핵심 키워드로 선택한 것이 바로 '정'이었습니다. 정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텐데요. 오리온은 초코파이를 그 정의 '매개체'로 포지셔닝하기로 했습니다.
오리온을 대표하는 제품인 '초코파이 정'/사진=오리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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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첫 전파를 탄 오리온 초코파이 정 광고는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냈습니다. 첫 광고 중 하나는 선생님과 학생의 이야기였는데요. 방과 후 텅 빈 교실에 선생님이 들어서자 한 남학생이 허둥지둥 교실을 가로질러 도망칩니다. 선생님이 책상 서랍을 열자 반성문 대신 초코파이 하나와 쪽지가 놓여 있습니다. 선생님이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창밖을 내다보자 멀리서 그 학생이 꾸벅 인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초코파이 한 개로 대신 전하는 광고였죠. 이때 제품명도 '초코파이 情'으로 바꿨습니다.
이후 오리온 초코파이 광고들 역시 이런 메시지를 유지했습니다. 군대 가는 삼촌의 가방에 "씩씩하고 용감한 국군 아저씨가 되세요"라는 쪽지를 몰래 넣는 조카, 시골 할머니 주머니에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쪽지를 슬며시 넣어두는 손녀, 건널목 경비원에게 말없이 초코파이를 건네는 소녀까지 수십편의 광고가 이어졌습니다.
정, 문화가 되다
이렇게 오리온 초코파이 정 광고는 스타급 모델 대신 집배원·경비원·간이역 역무원 같은 평범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됐습니다. 화려한 세트 없이 골목길과 동네 어귀, 학교, 집이 배경이 됐죠. 세트도, 유명 배우도 없었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장면들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제품'이 아니라 '감성'을 전면에 내세운 국내 최초의 사례였던 셈입니다.
오리온 초코파이 정 캠페인은 단순히 광고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오리온은 사회공헌 차원에서 전국 초등학교 책걸상 2만여 조를 교체하는 캠페인을 병행했는데요. 광고 속 '이웃을 챙기는 정'이라는 메시지를 실제 행동으로 옮긴 캠페인이었습니다. 이런 사회공헌 활동까지 더해지면서 오리온 초코파이는 인성(人性)을 가진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정의 메시지는 시대에 따라 변주됐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는 '정 소녀'를 등장시켜 "둥근 정이 떴습니다"라는 카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위로를 건넸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고등학교 남녀 학생 간의 우정을 모티브로 신세대의 정을 재해석했고요.
2006년에는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노타이 셔츠 차림으로 CM송을 직접 부르는 광고가 전파를 탔습니다. 유명 연예인 대신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게 등장한 오너의 모습은 '정'이라는 브랜드 메시지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의 정은 광고를 넘어 영화 속 소품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2000년 영화 'JSA'에서는 남북 병사들 사이를 잇는 매개체로 등장했고요. 2002년 '집으로'에서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마음을 전하는 소품이 됐습니다. 초코파이가 단순한 과자를 넘어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세계에 꽃 핀 정
오리온 초코파이 정 캠페인의 힘은 국내에서만 통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리온은 해외 시장에서도 각국의 고유한 정서에 정의 개념을 접목하는 현지화 전략을 폈습니다.
오리온은 중국에서 '정(情)'이 자칫 남녀 간 애정으로 읽힐 수 있어 현지 정서에 맞는 한자를 새로 찾았습니다. 정을 대신해 중국인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덕목인 '인(仁)'을 포장지에 새겼죠. 베트남에서는 정(情)과 같은 뜻을 가진 현지어 'Tinh'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갔고요. 일본에서는 맛있다는 의미가 담긴 '미(美)'를 브랜드에 녹였습니다.
이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출시 50주년을 맞은 2024년에는 역대 최대 판매량인 40억개를 기록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1974년 출시 이래 누적 판매량은 500억개를 돌파했고요. 누적 매출은 8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이 중 해외에서 올린 누적 매출이 전체의 3분의2에 달합니다. 국내 식품업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성과입니다.
베트남 유통 매장에 진열된 오리온 초코파이 정. / 사진=오리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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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판매량과 매출 수치만 좋은 게 아닙니다. 베트남에서 오리온 초코파이는 현지 파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며 제사상에도 오르는 국민 간식이 됐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전 세계 초코파이 판매량의 약 40%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고요. 현지 식문화를 반영한 잼을 활용한 제품을 포함해 12종의 초코파이를 생산·판매할 정도라고 하네요.
이렇게 오리온 초코파이는 정이라는 한국 고유의 정서가 언어와 국경을 넘어 통한다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책상 위에 말없이 초코파이를 올려두던 그 소녀의 마음이 전 세계 60여 개국으로 퍼져 나간 셈입니다. 말 한마디 없이 건네는 초코파이 한 개가 50년째 유효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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