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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2 (목)

    [기고]황사영 ‘백서’와 쿠팡의 ‘미국행’…외세에 기댄 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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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신유박해의 피바람 속에서,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충북 제천 배론의 토굴로 숨어든 사내가 있었다. 뛰어난 학식으로 ‘천재’라 불리던 황사영이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얀 비단 천 위에 1만3000여자를 피를 토하듯 적어 내려갔다. 조선 천주교회의 참혹한 실상을 낱낱이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밀서,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다.

    그러나 백서의 내용은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섰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 군함 수백 척과 무장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달라는 충격적인 제안을 담고 있었다. 종교적 신념의 절박함이 조국을 외세의 말발굽 아래 두겠다는 위험한 발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훗날 가톨릭교회 역시 선조들의 순교 정신은 기리되, 외세를 끌어들여 조국을 위협하려 했던 그 ‘방법’에 대해서는 성찰의 뜻을 밝혔다. 아무리 목적이 고결해도 외세의 칼을 빌려 동포를 겨누는 행위는 역사적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로부터 225년이 흐른 2026년 오늘,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현대판 백서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유통 공룡으로 비대해진 쿠팡의 행태다. 쿠팡은 알고리즘을 조작하고 임직원을 동원해 자체 브랜드(PB) 상품에 특혜를 준 불공정 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유통업계 역대 최대 규모인 162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한 규제였다.

    문제는 그 이후의 태도다. 쿠팡은 잘못을 반성하고 국내 사법 절차를 통해 소명하기보다 노골적인 ‘미국행’을 택했다. 미국 연방 로비 공개 기록에 따르면 쿠팡은 지난 5년간 156억원(약 1100만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워싱턴 정치권 로비에 사용했다. 나아가 쿠팡의 미국 투자사들은 한국 정부의 정당한 규제를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로 호도하며 국제투자분쟁해결절차(ISDS) 중재 의향서까지 제출했다.

    더 나아가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조사를 청원해 대한(對韓) 보복 관세의 명분을 만들려 했고, 미 하원 청문회에서 읍소하는 장면까지 연출했다. 200여년 전 황사영이 은밀히 보냈던 비단 편지가 오늘날 워싱턴 백악관과 의회에 전달되는 ‘항의 서한’으로 되살아난 듯하다. 자국 시장의 규제를 피하려 한·미 통상 마찰을 볼모로 정부를 압박하는 쿠팡의 행태가 과거 황사영의 위험한 발상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엄밀히 따지면 쿠팡의 죄질이 더 고약하다. 황사영에게는 핍박받는 신도들의 ‘생명’이라는 절박한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쿠팡에는 ‘기업의 탐욕’과 ‘독점적 이익 사수’라는 동기만 남아 있다. 제 잘못이 드러나자 미국 정부 등 뒤에 숨어 조국의 규제 당국을 압박하는 모습은 개탄스럽다.

    쿠팡은 미국 증시에 상장된 ‘뉴욕 기업’이라 자부할지 몰라도, 뿌리와 사업 터전은 분명 대한민국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땀 흘리고,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어 성장한 기업이다. 국내법을 어겼다면 국내법 테두리 안에서 당당히 다투면 될 일이다. 미국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에 기대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하려는 시도는 명백한 ‘경제 주권 침해’이자 강대국에 기대는 현대판 사대주의의 망령이다.

    자본은 국경을 넘나들지만, 지켜야 할 법과 도덕에는 경계가 있다. 정부는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지만 자본의 힘만 믿고 법치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까지 용납하지는 않는다. 쿠팡은 외세를 등에 업고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흔들려는 ‘21세기판 백서’ 작성을 즉각 멈춰야 한다. 조국과 소비자를 등지고 외세에 기대는 꼼수를 고집한다면 역사는 쿠팡을 ‘혁신 기업’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경제 주권을 흔든 장사치’로 기록할 것이다. 신뢰를 잃은 기업에 미래는 없다.

    경향신문

    전수미 변호사


    전수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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