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속·전고체·AI 등 성능 우위로 기술 장벽 구축 나서
안전·잔존가치 가늠자 된 배터리…車 품질 척도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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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부터 사흘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2026'의 풍경은 예년과 사뭇 달랐습니다. 부스를 빼곡히 채웠던 화려한 전기차들은 자취를 감췄고 거대한 에너지저장장치(ESS)와 휴머노이드 로봇용 제품들이 대신했습니다. 배터리 업계 시선이 ESS와 로봇 등 신규 시장으로 빠르게 옮겨가면서 전기차가 당연하게 보였던 주연 자리에서 내려온 모습입니다.
실제로 올해 인터배터리 행사에서 전기차를 전면에 내세운 기업들의 비중은 급격히 줄었습니다. SK온은 제네시스 GV60 마그마 1대, LG에너지솔루션은 르노 세닉 1대를 각각 전시하는 데 그쳤고 삼성SDI는 아예 한 대도 배치하지 않았죠. 배터리 업계 시선이 전기차를 넘어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글로벌 판 커지는데 줄어드는 몫
지난 11일부터 사흘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2026' SK온 부스에 전시된 제네시스 GV60 마그마./사진=도다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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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전시가 희소해진 것은 배터리 기업들이 처한 고민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휴머노이드 등 신규 시장이 부상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기업의 명운을 쥐고 있는 본진은 전기차이기 때문이죠.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누적 수주잔고는 이미 1000조원을 넘어섰는데 이 중 절대다수는 완성차 업체와의 장기 공급 계약입니다.
문제는 화려한 성적표가 결코 이들을 안심시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가 공세를 넘어 이제는 기술력까지 장착한 중국 기업들이 한국의 주 무대였던 프리미엄 시장까지 빠르게 점령하며 우리 점유율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미 판을 장악한 중국산과의 차별화를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신기술을 앞세워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새로운 생존법을 모색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냉혹한 시장 지표와 궤를 같이합니다.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각국에 등록된 전기차 배터리 총사용량은 약 1187GWh로, 전년 대비 31.7%나 증가했습니다. 전기차 캐즘 우려가 무색하게 전 세계적인 전기차 전환의 판은 계속해서 커진 것이죠.
문제는 커지는 파이에 비해 우리 기업의 몫은 여전히 정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같은 기간 국내 배터리 3사의 글로벌 합산 점유율은 전년 대비 3.3%p 하락한 15.4%에 그쳤습니다. 시장은 성장하는데 우리 기업의 마켓셰어만 줄어드는 구조적 위기가 수치로 드러난 셈입니다. 가격과 물량을 앞세운 중국의 독주 속에서 더 많이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생존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싼 가격 근거 대라" 격차 입증할 기술은
1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내 최대 배터리 전시회 '인터배터리 2026'에 참가해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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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배터리사가 찾은 돌파구는 중국산 배터리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적 격차를 통해 비싼 가격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차량 대신 날 선 기술들이 전면에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른바 '불 안 나는 배터리'로 여겨지는 전고체 배터리 실물을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액체 대신 고체를 사용해 화재 위험을 원천 차단한 것이 이 배터리의 특징입니다. 회사는 오는 2029년 전기차용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를 시작으로, 2030년에는 배터리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여 주행거리를 늘리는 차세대 기술을 로봇 등에 우선 적용할 계획입니다.
SK온은 충전 스트레스를 없애는 데 집중했습니다. 단 7분 만에 80%까지 충전이 가능한 '하이퍼 패스트' 기술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여기에 냉각 성능을 기존보다 3배 높인 대면적 냉각(LSC) 기술과 에너지 밀도를 500Wh/L까지 끌어올린 LFP 배터리를 통해 중국산 가성비 제품이 해결하지 못한 안전과 고성능의 동시 확보를 제조사 신뢰도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삼성SDI는 아예 전시 콘셉트를 '인사이드 AI'로 잡고 전기차 너머의 영토 확장을 공식화했습니다. '솔리드스택(전고체)'과 '프리즘스택(각형)'이라는 독자 브랜드를 공개하며 기술 표준 제안자로서의 위상을 굳히는 한편, AI 데이터센터용 UPS와 휴머노이드 로봇용 전고체 샘플을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전기차 시장이 주춤한 사이 로봇과 AI 인프라 시장을 선점해 삼성 배터리의 가치를 산업 전반의 표준으로 만들겠다는 셈법입니다.
부품에서 '보증서'로
최근 소비자들이 전기차를 구매할 때 가격뿐 아니라 배터리 제조사를 확인하기 시작한 것도 배터리가 더 이상 부품이 아니라 안전성과 중고차 가격(잔존 가치)을 결정짓는 실질적 지표로 부상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배터리는 차량 설계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잇단 화재와 리콜, 제조원 은폐 논란 등 사태를 거치며 이제는 차량의 완성도나 신뢰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비자 인식 변화는 장기적으로 배터리사가 완성차 업체를 상대로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기술적 차별화가 '믿고 살 수 있는 브랜드'라는 시장 확신으로 이어질 경우 과거보다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명분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공급사가 완제품 제조사를 상대로 협상 우위를 점했던 사례는 과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CPU가 무엇인지 몰랐던 소비자들에게 인텔 칩이 탑재된 컴퓨터가 곧 고성능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켜 협상 주도권을 쥐었던 '인텔 인사이드' 사례가 그러합니다. 기술력과 이름값을 결합해 부품 공급사가 완제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상징으로 거듭난 경우죠.
여기에 제도적 변화도 힘을 보탭니다. 유럽을 시작으로 도입되는 '배터리 여권' 제도와 국내의 배터리 정보 공개 의무화는 누가, 어떻게 만든 배터리인가를 숨길 수 없는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황경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한국 이차전지 산업은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과 중국산 배터리의 공세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배터리 셀 업계의 해외 생산 비중이 90%에 달하는 상황에서 제품 신뢰도를 높여 가격 경쟁을 피하고 고부가가치 시장을 사수하려는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분석했습니다.
K-배터리는 지금 가장 치열한 생존 게임 한가운데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 판은 커지는데 우리 몫이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단순 납품업체 꼬리표를 떼고 자동차 시장의 새로운 권력인 품질 보증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지켜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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