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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6 (목)

    [일사일언] 깜빡하고 바지 안 입고 나온 옛 TV 광고 속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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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본 TV 광고가 문득 떠올랐다. 광고에는 한껏 차려입은 여성이 자신의 외모를 뽐내며 거리를 걷는 모습이 나온다. 거리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만족하는 표정을 짓던 여성이 갑자기 공포에 질린다. 카메라가 멀어지면서 전신이 드러나는데, 풍성한 장식의 화려한 반코트 아래로 짧은 파자마 바지와 빨간색 힐이 보인다. 알고 보니 바지를 깜빡하고 갈아입지 않은 채 외출한 것이었다.

    하의를 가리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성의 모습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무슨 광고였는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당시에 이 광고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만 또렷하다. “에이~ 구두까지 챙겨 신으면서 어떻게 바지 입는 걸 까먹어?”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광고 속 여성의 모습이 과장된 것은 맞지만,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일상이 무너지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직장에 다니다 보면 정해진 루틴 안에서 쳇바퀴를 돌듯이 사느라 ‘일상’ 자체를 갖기 힘들다. 프리랜서의 삶은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일과 쉼의 경계가 훨씬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동시에 작품 연습을 하고, 언제나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구직 활동을 겸한다. 개인 작업을 위한 지원 사업 기획안 구상도 멈출 수 없다. 또, 집안일도 해야 하고, 먹고살기 위한 아르바이트도 뺄 수 없다. 연극으로는 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열해도 벌써 여섯 개의 창이 늘 동시에 열려 있는 셈이다. 여기에 가족이나 대인 관계를 위한 창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이 외에도 부수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들도 아주 많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서로 뒤엉켜 있어 늘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데,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부터가 삶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때때로 어떤 바지를 입을지 고민할 여유 따윈 없게 된다.

    부끄럽지만, 당연하고 사소한 루틴을 새까맣게 잊어먹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어른이 되면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 늘어 뇌를 여러 창으로 쪼개 쓰려니 쉽게 소진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그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너무 많은 창을 동시에 띄워둔 채 하루를 버티느라, 정작 가장 기본적인 일상은 자꾸만 뒤로 밀려난다. 문득 광고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것도, 이제는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쩐지 조금 짠하다.

    [베튤 준불·배우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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