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뽀로 북쪽… 집집마다 주소 대신 생년월일 붙여 놓은 시골
부디, 눈보라 속에 우뚝 선 한 그루 나무처럼 고요하자
크리스마스 카드만한 마을, 비에이. 골목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사진=변종모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바다 위를 날던 비행기가 홋카이도의 경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체가 자주 흔들렸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긴장된 자세로 창밖을 보며 애써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내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저 빨리 착륙하기만을 바라면서. 부정기적으로 편성된 아사히가와(旭川)행 티켓을 얻은 것만으로 행운이라 생각했기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흔들리는 비행기쯤이야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들어선 설국은 차갑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울처럼 신비롭게 산란되는 눈의 빛이 따뜻하게 여겨졌다.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로 겨울이면 일부러 따뜻한 나라를 찾아다니거나, 아예 여행을 접고 집 밖을 나서지 않던 내가 설국의 티켓을 손에 넣고 이렇게 즐거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겨울의 절정으로 치닫는 1월 말이었고, 50년 만의 폭설이라는 뉴스는 한국에서부터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국으로 이어진 작은 마을의 골목에 서서 손을 비비며, 호호 즐거운 입김을 분다.
◆ 삿포로에서 기차 타고 한 시간 반, 1년의 절반이 겨울인 일본 시골
비에이(Biei, 美瑛)는 그야말로 작은 시골마을이다. 작은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당하게 어울리는 마을. 과장을 하자면 크리스마스 카드만한 마을이다. 경사가 심한 지붕의 집들을 마주한 좁은 골목들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끊겨,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쉽게 제자리며 숨을 곳이 없다. 여기서 길을 잃고 헤맬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에이역을 중심으로 낮게 펼쳐진 집들은 저마다 이마에 숫자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다. 이 숫자는 주소가 아니라 집이 태어난 연도다. 적게는 몇 십 년부터 많게는 백년이 넘는 집들이 동화처럼 옹기
종기 모였다. 새하얀 눈에 덮인 집들이 백발의 마음씨 좋은 노인들처럼 다소곳하고 따뜻하다. 소박한 이 골목에는 높은 담도 없고 넓은 마당도 없다. 그저 눈이 쌓인 골목과 눈이 쌓여가는 골목이 있을 뿐이다.
눈이 내리거나 내리지 않는 날에도 언제나 겨울 동화가 펼쳐진다./사진=변종모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처럼 눈이 날아들었다. 여기서는 바람이 분다고 하지 말고, 눈이 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온통 겨울의 흔적뿐인데도 떨리지 않는다. 추운 건 사실이지만 견딜만했다. 반가운 카드처럼 단정히 접힌 골목 안의 사람들. 작은 우동가게 주방장의 선한 눈인사, 먼저 달려 나와 문을 열던 아주머니의 따뜻한 어깨는 오래된 친절이 배어있다. 약국이나 주요소에서도 그랬고 어느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자체가 마을을 닮았다. 작고 다소곳한 사람들. 집들이 이마에 자랑스럽게 제 생년을 떳떳하게 달고 있듯이, 사람들도 얼굴에 각기 다른 따뜻함을 달고서 환하다. 1년에 반 이상이 겨울인 이곳에서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따뜻함을 지피는 마음의 간격이 아주 촘촘하게 박힌 골목. 겨울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던 내가 겨울의 가장 북쪽, 북쪽의 가장 안쪽 작은 마
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
◆ 혹독한 추위, 각기 다르게 따뜻한 이웃에 기대어 겨울 난다
덕분에 잠시 따뜻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골목의 바깥으로 펼쳐진 거대한 추위에 맞서기 전, 작은 마을의 골목에서 잠시 몸과 마음을 녹인다. 골목 안쪽에서 드문드문 인기척이 들리고, 다시 꽃잎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 동안에도 훈훈한 풍경만 흩날린다. 이 순간만큼 눈이 아니라 꽃이라 생각한다.
한밤중에도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쌓여 갈 것을 목적으로 내리는 눈은 거대한 겨울의 욕망 같았다. 별도 달도 없는데 오래토록 환한 밤. 몇 번의 뒤척임 끝에 하얀 꿈을 꾸다가 눈을 떴다. 여전히 꿈처럼 하얗게 펼쳐진 세상이다. 고요히 잠든 사람들의 골목을 벗어나면 오로지 무채색의 풍경 뿐이었다. 겨울이 끝나면 이곳도 사람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각자의 색으로 아름답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흰 눈 뿐이다.
세븐스타나무. 줄지어 선 자작나무 언덕 역시 광고배경이 되어서 사람들 발길을 묶는다./사진=변종모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며칠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눈의 세상이다. 도시에 굴러다니는 눈이 아니라 한 번도 침범 당한 적 없는 순백이다. 내가 본 유일한 순백의 풍경이다. 며칠 째 꿈같은 세상에 놓여있다. 아니다 꿈과 현실을 동시에 걷고 있다. 사실,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크리스마스 나무’라는 제목이 붙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눈의 언덕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 세월의 흔적을 감춘 듯 비밀스런 둥근 언덕, 표정을 명확히 알 수 없는 나무 한 그루. 새하얀 눈에 덮인 언덕은 음흉하지도 않고 발랄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눈의 언덕 가운데 홀로선 나무가 어떤 날은 거대하게 보였다가, 어떤 날은 하얀 케이크 위에 꽂힌 작은 장식품 같기도 했다. 그게 소설의 한 문장처럼 깊이 박혀 타게 된 비행기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무를 마주하고 나무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다. 눈이 오는 날이기도 했고 해가지는 저녁이기도 했다. 마주하는 풍경은 사진에서 보다 깊고 거대했다. 수시로 달라지는 눈의 힘을 본다. 거대한 나무는 폭설에 잠시 사라지기도 했고, 커다란 그림자를 앞세우 고 성큼 다가오기도 했다.
◆ 홀로 굴파고 추위 먹으며 살던 우리들, 따뜻해지자 의연해지자
사진에서 알 수 없었던 나무의 일상을 대면하자니 비밀을 엿본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능선을 나타내는 표식처럼 간혹 한 그루의 나무가 서있거나, 어쩌다 숲을 이루어도 황량하고 휑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더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풍경 속에서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행복하고 포근한 웃음을 겨울하늘에 피워 올렸다. 사람들도 풍경처럼 보기 좋았다. 온통 새하얀 풍경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주인공이 되고 빛이 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새하얀 배경으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거나 아예 새하얗게 파묻혀도 그것대로 풍경이 되어 아름답다.
누가 가더라도 어떤 것들이 놓이더라도 말이다. 확실히 눈은 스스로 빛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빛내거나 함께 빛내는 일로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날카로운 겨울이 내 안에서 점점 무뎌지고 있다. 도착하고 보니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가 사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사진 속의 나무를 닮고 싶었을 것이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잠시의 고요도 없이 분주하게 사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살며 긁힌 마음 하나 위로하고자 홀로 추위를 파먹으며 굴처럼 은밀하게 살아도, 결국은 내 안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적막을 깬다. 자주 눈보라를 일으킨다. 쉽게 흔들리는 마음은 고요에 익숙할 틈이 없다. 어지럽고 복잡한 풍경 안에서는 내가 나를 잘 볼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풍경. 이곳의 겨울나무처럼 발을 묻고 서서 내 앞에 그어진 능선을 닮고 싶었다. 심하게 바람이 불거나 거칠게 눈발이 날려도 잠시 흔들릴 뿐 결코 심하게 넘어지거나 주저앉은 적 없는 저 나무를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기엔 하늘과 하늘을 닮은 능선과 내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예컨대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함은 새롭게 써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당신의 깨지고 상처 난 부분을 고요의 풍경에 담그고 해열시키기 좋은 곳. 걸리적거릴 것 없는 이곳에서 한 번쯤 고요하자. 고요히 나만을 빛내어 스스로를 조금 더 사랑하자. 어느 날 또 눈보라처럼 흔들리는 겨울이 오면, 나는 좁고 소박한 이 골목의 끝에 걸린 새하얀 눈의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러 올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싶을 것이다.
PS 작지만 꽉찬 눈의 나라로의 여행
비에이 대표적인 모델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
홋카이도의 중심 삿포로에서 북쪽으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곳. 비에이. 우리나라에서 겨울철엔 부정기적으로 비에이와 가장 가까운 아사히가와 공항으로 직항편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날씨에 변동이 많은 편. 겨울이라도 렌트카를 신청하면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아름답게 펼쳐진 라벤더가 장관을 이루며, 시원한 날씨 때문에 내국인 여행객들이 많아서 오히려 호텔예약이 힘들 수 있다.
대부분 삿포로에서 하루 코스로 다녀오기도 하지만, 1박 2일 코스나 그 이상 며칠 여유롭게 머물며 순도 100%의 겨울 풍경을 만끽하길 권한다. 작은 도시지만 인터넷에 소개된 유명 맛집이나 카페가 생각 보다 많아서 찾아다니는 재미 또한 크다. 온천을 즐기거나 겨울 레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
[변종모 여행칼럼니스트]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