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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 (수)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62년생 남정숙이 미투 대모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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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성균관대 문화융합대학원 성폭력 피해자 남정숙 전 교수…

승승장구하던 문화마케팅 1인자는 어떻게 무명의 피해자가 됐나


<한겨레21>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2018 미투 운동’을 해석하고 다른 미래를 위한 단초를 찾는 기획, ‘미투 성공의 조건’을 시작했다. 1회에선 직장 내 미투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2차 피해 문제(제1208호 ‘2차 피해 결정판, 전남CBS 성폭력’)를 다뤘다. 2회는 대학의 성폭력 피해를 ‘강간문화’라는 렌즈로 들여다본다. 2회의 첫 순서는 남정숙 전국미투피해생존자연대 대표(사진)의 스토리다. 1세대 문화기획자로 승승장구하던 여성이 대학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고, 결국 퇴출되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일반 기사가 아닌 ‘팩트스토리’로 다룬다. 팩트스토리는 논픽션의 일종으로, 사실에 기반해 사건을 서사적으로 구성하는 형태다.

남정숙씨는 서지현 검사가 JTBC 인터뷰를 한 바로 다음날인 1월30일 가해 교수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 1심에서 이겼다. 2월14일엔 검찰이 기소한 가해 교수의 강제추행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기사는 판결문과 재판에 쓰인 녹취록과 자료, 기존 언론 보도 등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정보를 토대로 작성했다. _편집자








기획연재_미투의 미래





① 직장: 2차 피해의 메커니즘

② 대학: 가해의 대물림


③ 학교: 페미니스트 소녀들이 사는 법

④ 법률: 젠더 베스트 워스트 판례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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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생 남정숙씨는 82년생 김지영씨와는 다른 세상에 살았다. 1남2녀 가족구조에서 벌어지는 흔한 성차별을 남정숙씨는 겪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씨가 남동생의 분유를 훔쳐먹다가 할머니에게 맞을 때, 62년생 남정숙씨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로부터 ‘장손’ 대접을 받았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남씨는 남성들과 동등한 파트너로 일하거나 남성들을 부리는 일을 했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1993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개장한 어린이 전문 백화점 ‘키디하우스’ 설립 기획자로 일했다. 서울 정도 600주년, 광복 50주년 기념 행사 등을 연출한 것이 30대 초반의 일이었다. 현장 인력은 대체로 남성이었고, 젊은 여자 연출자를 동물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남성들을 다루려면 일단 서열부터 정리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때 터득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실시로 지방자치제가 본격화하면서 전북 익산, 강원도 평창, 경기도 수원, 경북 안동 등 많은 지자체가 지역 특화 문화 콘텐츠 개발과 지역 축제 총감독을 남씨에게 맡겼다. 2006년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은 뒤엔 예술의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발전 전략을 짰다. 남씨가 개척한 문화마케팅 분야에 여성의 진입을 막는 ‘유리천장’은 없었다.

남정숙씨가 82년생 김지영씨와 같은 세상에 살게 된 것은 대학에 입성하면서였다. 2009년께부터 성균관대 문화예술 분야 강의를 하거나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협업하게 된 A교수는 남씨를 동료가 아니라 성희롱 대상으로 삼을 때가 많았다. 2014년 문화융합대학원을 개원한 뒤 A교수가 원장으로, 남씨는 전임교수와 같은 대우를 받는 전임대우교수로 일할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2015년 2월23일 늦은 밤 성균관대 문화융합대학원 B교수로부터 남씨가 성폭력 피해자가 됐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남씨의 업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2015년 2월23일_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B교수 “C팀장이 선생님들이 들어가 있으면 안 되니까, 빠지라고 했어. 일단 경위서를 쓰래.”

남정숙 “어머, 우리 실명을 썼대? 아 좀 부끄럽다.”

B교수 “진짜 창피해. 무슨 망신이야. 아무튼 B팀장은 ‘기분은 매우 언짢았지만, 수치심은 느끼지 않은 걸로 해서 이름을 빼는 게 좋겠다’는 거야.”

B교수는 문화융합대학원 학생 2명이 이날 성균관대 성평등상담실에 남정숙씨와 자신이 당한 성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익명 투서를 했다고 알려줬다. 남씨나 B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이 못한 일을 대신해준 것이 고맙지 않았다. 성폭력 피해 사실은 숨기고 싶은 치부였다. A교수가 처벌까지 가능한 성범죄를 저지른 것은 명백했지만, ‘비즈니스우먼 남정숙’에게 성폭력 피해자라는 지위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성평등상담실이 아닌 교무처 교직원이 사건 해결에 팔을 걷어붙인 일이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가해자인 A교수를 위한 일인지도 그냥 묻어두고 싶었다. 익명 투서가 접수된 바로 그날 벌어진 일련의 일이 ‘성균관대 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 관한 내규’를 정면으로 위배한 사실을 따지는 건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은 남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피해의 기억은 또렷했다. 1년 전 2014년 4월 엠티(MT·모꼬지)에서 A교수는 남씨의 몸을 추행했다. “우리 둘이 오늘 같이 잘 테니까 우리 방은 따로 준비하라”고도 했다. B교수도 이런 희롱을 당했다. 11월 엠티에선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만드는 소맥 자격증이 있다고 말한 대학원생에게 “그 자격증은 술집 여자들이나 따는 것”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맛있지”라고 말한 사실을 전해듣기도 했다.

아무도 모르는 또 다른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2011년 다른 대학원의 엠티에서 A교수는 남씨가 자는 방에 몰래 들어왔다. 그는 뒤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남씨를 추행했다. 저항하는 남씨에게 이불을 덮어씌우며 “아 따뜻해, 가만히 있어요”라고 말하던 음험한 목소리가 되살아나자 훅 소름이 끼쳤다. 2011년에도, 2014년에도 그는 대학원의 수장이었다. 남씨는 A교수와 같이 일한 2009년 이래 자신이 문화마케팅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로 대접받은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2011년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그때 왜 공론화하지 않았을까.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비즈니스우먼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훼손되지 않은 것은 성추행 사실을 스스로 은폐한 결과이지 않을까, 남씨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덮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씨는 현장에서 전문가로 일할 때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2015년 12월28일_ 학교 이미지를 실추했다

D교수 “A교수한테 전화가 왔어요. 본부나 이런 데서 ‘이거는 남정숙 선생 장난이다’ 생각한다는 거야.”

남정숙 “뭐라고요?”

D교수 “부총장도 지금 얘기가 같아요. 이게 특정한 사람이 많이 기여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간다는 거지. 내가 볼 때는 본부에서는 부총장 포함해서 이걸 덮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익명 투서 접수 일주일이 지난 2015년 3월2일, 또 다른 동료 교수 D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학교 본부 쪽에서 익명 투서를 한 학생들의 ‘배후’에 남씨가 있고, 그가 A교수를 음해하려 꾸민 일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제보였다. 남씨는 자신의 명예를 훼손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조사위원회 4번, 징계위원회 8번이 열리는 동안 남씨는 “저는 피해자고, A교수를 가해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자신을 의심하고 추궁하는 위원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한 조사위원은 “그분이 지각이 아주 없으신 분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고 가해자를 두둔했다. 보직교수들로 이뤄진 징계위원회는 피해자인 남씨가 아니라 ‘학교 이미지’를 걱정했다. 엠티에 참석한 학생들 3분의 2 이상을 조사했는데 피해 사실을 확인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를 징계위원회에서 들은 날, 문화융합대학원 학생회장은 징계위원회 조사에 응한 학생이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남씨에게 말해주었다.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가 진행될수록 대학 내 서열이 분명해졌다. A교수는 가해자 처지에서도 남씨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익명 투서 접수 5개월 만인 2015년 7월10일, 남씨는 A교수를 정직 3개월의 ‘중징계’에 처하기로 의결했다는 공문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녹음기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거짓 진술했다’ ‘비위 행위를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허위 사실을 주장해 학교 이미지를 실추했다’며 남씨를 비난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 공문의 진짜 의미는 2015년 12월28일 명확해졌다. 이날 남씨는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공문을 받았다. 성폭력 피해 공론화 과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복 행위였다. 급여 등 모든 처우가 전임교수와 다름없다고 했던 ‘전임대우교수’라는 지위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남씨는 자신이 언제든 계약 해지가 될 수 있는 ‘비정규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퇴출로 마감된 성폭력 사건의 책임이 A교수에게 있는지, 징계위원회에 있는지, 아니면 성폭력을 합리화하는 대학의 남성연대와 ‘강간문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녹음기를 가져가고, 언론 인터뷰를 한 자신을 탓하는 것을 보곤 끝내 주저앉아 울었다.

2018년 3월27일_미투의 대모가 되다

E교수 “1~2년 일하신 것도 아니고, 또 새롭게 대학원 하나 만들어서, 새로 출발해서 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거잖아요.”

F처장 “진짜 큰일 하신 거예요.”

E교수 “그게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매진하지 않으면 결실을 맺기가 어려운 일을 하셨잖아요.”

성폭력 사건을 덮으라고 설득하던 그때 그만두었으면 좋았을까. 2015년 3월27일 세 번째 조사위원회에서 E교수와 F처장은 남정숙씨가 문화융합대학원 설립을 주도한 ‘공로’가 성폭력 피해 사실에 묻히는 일을 걱정했다. 남씨는 2013년 5월 A교수로부터 문화융합대학원 설립 계획서 작성을 부탁받은 뒤 설립계획안, 문화융합대학원 개원 보도자료, 교과목 등록부, 학칙, 장학금 지급 규정 등을 전담해 만들었다. 문화융합대학원에 없으면 안 될 사람이 남씨였지만, 문화융합대학원 추진위원장이라는 대외적인 자리는 A교수 차지였다. 스포트라이트와 박수갈채를 받는 무대 위엔 A교수가 있었고, 남씨는 그의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었다.

2014년 3월25일 KBS미디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날에도 A교수는 “총장실이 비좁으니 오지 말라”고 남씨를 ‘커튼’ 뒤에 숨겼다. 언론에 보도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제외하고 양해각서 체결 전후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자리에 남씨가 빠진 적은 없었다. 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4월18일 A교수, KBS미디어의 G원장과 가진 술자리에서 남씨는 문화융합대학원 설립을 주도한 전문가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A교수는 “남정숙씨가 마음에 들어서 어찌해보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했고, G원장은 “첫사랑을 닮았다”고 했다. A교수는 D원장과 남씨를 양쪽으로 밀어 강제로 끌어안도록 했다.

대학 바깥에서 ‘남정숙’이라는 이름으로 일한 모든 성과는 남씨의 것이 되었다. 대학에선 ‘남정숙’이라는 이름으로 한 모든 일이 A교수의 것이 됐다. 남씨는 자주 A교수의 ‘여자’ 취급을 받았다. 자신의 업적을 도둑질한 진짜 가해자가 A교수인지 대학인지 남씨는 혼란스러웠다.

남정숙씨에게 2018 미투 운동 국면에서 ‘대학가의 서지현’이라는 낯선 타이틀이 생겼다. 3월27일엔 전국미투피해생존자연대를 발족해 다양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대모 역할을 했다. 자기소개가 필요 없는 삶을 살던 남씨는 오늘도 기자를 만나, 여성가족부와 교육부 공무원을 만나, ‘미투연대 대표’라는 낯선 직함을 달고 자기소개를 한다. 최근 찾은 정신과에선 그에게 적응장애,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진명선 기자torani@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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