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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변종모의 세계의 골목] 바람아 불어라!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깨끗한 풍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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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따라 떠난 풍차의 언덕, 그곳에서 맛본 순한 바람
라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의 배경이 된 곳

조선일보

콘수에그라의 풍차./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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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또 봄바람 불었구나.” 그렇다. 바람이 들었다. 나로서는 바람이 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때쯤, 마음속 어딘가에 커다란 풍차가 돌며 자꾸만 따뜻한 봄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속에서부터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시 배낭을 꾸렸다. 바람을 잠재울 방법은 없다. 그냥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가거나, 바람 속을 오래도록 헤매다 돌아와서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제자리를 걷는 것이다. 간혹 나만 아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도 어김없이 바람이 불었다. 대부분의 사람도 나처럼 마음속 어디에선가 봄바람이 자주 분다는 것을 안다.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다.

◇ 봄바람 불면 생각나는 풍차 마을, 콘수에그라

바람의 서식지 콘수에그라(Consuegr)를 찾아 나선 것은 마드리드(Madrid)에 도착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많은 여행자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보러 간 저녁에도 홀로 숙소에 남아서 하얀 풍차의 사진들을 봤다. 거대한 네 개의 날개가 단단하게 하늘로 뻗은 풍차들이 줄지어 있는 평온한 언덕에서 순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시원한 사진이라 생각했다.

사진 속 바람이 회오리처럼 빨아들이는 시간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어릴 적 처음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 무모하고도 용감한 돈키호테가 좋았다기보다 이국적인 이름 자체가 좋아서였는지 모른다. 거대한 로봇이나 그 이상의 내가 본 적도 없는 어느 생명체의 이름 같았던 돈키호테가 용맹하게 한 판 승부를 걸었던 풍차. 그 풍차를 보게 된다면 나도 어떤 새로운 도전이나 희망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배낭을 꾸렸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 속에 오래도록 돌고 있던 바람의 실체를 보러 간다는 마음에 무조건 긍정적이고 좋은 마음이 되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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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마을 콘수에그라는 낮은 집들이 이마를 맞댄 작은 시골 마을이다./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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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마드리드 외곽으로 달린 지 정확하게 두 시간 만에 도착한 콘수에그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다. 도시라고 하기엔 그물처럼 빈틈이 더 많은 곳이다. 하루에 겨우 서너 번의 버스가 지나가고, 그보다 드물게 여행자들이 텅 빈 정류장을 이용했다. 그래서 좋았다. 낮은 집들이 이마를 맞댄 오래된 마을은 차분하고 단정해서 낮잠이 저절로 올 것 같다. 실제로 잠꼬대 같은 어눌하고 수줍은 소리로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확연히 마드리드의 경쾌한 소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렇게 좋은 감정으로 만난 마을의 골목 끝. 바람의 냄새가 났다. 그 끝에 걸린 바람의 표식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골목 끝으로 아련하게 보이는 거대한 풍차는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던 소설 속의 실체이자, 근거 없이 자주 불어대는 바람의 상징이기도 했으니 익숙하고도 반갑다.

바람을 엮어내는 거대한 날개는 하늘의 창문처럼 반듯하고 견고했고, 희고 둥근 몸체는 허공의 등대처럼 우뚝하다. 그 곁에 서고 싶어서 자주 내 마음에 바람이 일었다. 오래된 마을 언덕 위로 펼쳐진 바람의 집들. 마치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바람이 잉태되어, 몇 개의 대륙을 떠돌다가 끝내 너와 나 사이를 시원하게 통과할 거라 상상했다. 그때마다 너는 내게 웃어주었을 것이고 나도 너를 닮은 모습으로 웃었을 것이다.

◇ 풍차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순한 바람

답답한 마음이 자주 찾아올 때마다 이런 풍경들을 떠올리며 위로했던 시간의 실체에 나는 발을 딛고 있다. 한낮의 뙤약볕도 깊은 밤의 별들도 이 바람을 맞고서 자라듯 이곳을 스치는 모든 것이 막 태어난 공기처럼 신선했다. 마을의 성당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도 하릴없는 카페의 빈자리에도 순한 바람처럼 부드러운 공기가 흐르던 곳.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아름다운 풍차의 언덕이 깨끗한 눈과 밝은 마음이게 한다. 잘 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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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바람을 엮어내는 풍차들./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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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진공의 나날들. 지친 밤이거나 피곤한 오후에도 우리가 끝내 주저앉지 않는 이유는 내 안의 선선한 바람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믿는 것들. 그 방향으로 부는 바람을 생각하며 천을 짜듯 바람을 엮을 것이다. 은밀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바람의 깃발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든, 나만 아는 곳에 거대하게 세워둔 풍차를 보러 가는 날까지 바람 속을 걷듯 걷는다. 조금 흔들리거나 잠시 멈춰도 상관없다.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에 언젠가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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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수에그라의 풍차 언덕에 있는 낡은 성에서 내려다본 목가적인 풍경./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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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마드리드에서 풍차의 풍경 라만차까지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곳은 마드리드(Madrid)다. 수도 마드리드는 모든 건축, 예술, 스포츠를 막론하며 지리적으로 중심부에 위치한 관계로 도시 간의 연결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3대 미술관에 속하는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박물관과 왕궁들 역시 빼놓을 수 없으며, 운이 좋다면 세계적인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다. 근교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다양한 분위기의 소도시들이 많은데 중세도시의 면모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톨레도(Toledo)와 절벽 위의 도시 쿠엥카(Cuenca), 스페인 최대의 로마 유적지 메리다(Merida)와 세고비아(Segovia) 등 마드리드에 짐을 풀고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이다.

풍차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마드리드의 톨레도(Toledo) 근교 라만차(La Mancha) 지역에 세 곳이 모여 있다. 캄포 데 크립타나(Campo de Criptana), 엘 토보소(El Toboso), 콘수에그라(Consuegra)는 서로 멀지 않은 곳이라 자동차를 이용한다면 하루 만에 충분히 둘러볼 수도 있다. 기차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는 하루에 한 곳 정도를 목표로 여유 있게 방문하는 것이 현명하다. 각 지역별로 풍차의 개수나 분위기가 다르다. 콘수에그라는 풍차 언덕에 있는 낡은 성에서 내려다보는 목가적인 풍경을 놓치지 말자. 그리고 엘 토보소는 돈키호테를 떠올리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박물관 관람도 좋은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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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

[변종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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