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7 (수)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e기자가 만났다] '직장갑질119' 오진호 위원 "사장님 턱받이 해주면서 갑질인지 모르는 '을' 많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투데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것이 '갑질'임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죠."

'직장갑질119' 오픈 채팅방에는 자신이 당했다는 갑질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육아 휴직 신청서를 내고 상사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힌 직원, 짧은 치마를 입고 걸그룹 춤을 췄던 간호사, 최저임금 인상분을 페이백 해야 했던 보육교사. 갑질을 제보하려 했던 또 다른 '을'은 다른 '을'들의 피해사례를 보면서 내가 당하는 게 갑질인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7일 오후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직장갑질119 사무실에서 만난 오진호 운영위원은 본인이 당하는 가혹 행위가 갑질임을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의 직장 문화에서는 자신이 당하는 것이 갑질임을 깨닫는 게 쉽지 않다"면서 "이제는 갑질을 인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방과 처벌로 발전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 위원은 카카오 오픈채팅에 '귤'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이 들어와 말없이 한참 동안 대화를 지켜봤던 사례를 얘기했다. 그에 따르면 '귤'은 "다들 엄청난 갑질에 시달리네요"라면서 "우리 회사는 점심시간만 되면 직원들이 사장님 '턱받이'를 해드리는데, 제가 당한 건 갑질도 아니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오픈 채팅방 참여자로부터 "그건 명백한 갑질"이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이투데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본인이 당하는 갑질을 인지했다면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 위원에 따르면 직장갑질119에 들어오는 제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갑질은 '직장 상사의 사적 지시·괴롭힘'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증거 확보'다.

오 위원은 "상사의 폭언을 녹음하고, 협박하거나 사적인 지시를 내리는 메시지를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증거 없이는 가해자의 갑질을 증명하기가 힘들다"라고 말했다.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가해자가 오리발을 내밀기 시작하면,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증거 확보가 어렵다면 또 다른 대안은 피해자끼리의 '연대'다. 직장 갑질 대부분은 가해자는 한 명인데 피해자는 여러 명인 경우가 많으므로, 그들끼리 힘을 합쳐 가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림성심병원 사례다.

"한림성심병원 간호사들이 선정적인 의상을 입고 걸그룹 섹시 댄스를 강요받았던 피해 사례는 간호사끼리의 연대가 없었다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더 적극적으로 제보에 나섰고, 최초 제보 한 달 만에 조합원 2000명 규모의 노조가 만들어졌죠."

최근 사회복지시설에서의 갑질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직원들끼리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당 시설의 이사장실은 '백악관'으로 불렸고, 직원들은 이사장을 '백악관 할머니'로 모셔야 했다. 시설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함께 뜻을 모아, 원장이 장애인들을 학대하고 성희롱했던 일, 원하는 집회에 직원들을 동원했던 일 등을 고발했다.

이투데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도 상사의 갑질은 똑같습니다."

흔히 좋은 기업이라 불리는 직장에서도 갑질이 일어나는지 묻자 오 위원은 단호히 말했다. 그에 따르면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는 업무 성과나 인사를 핑계로 한 괴롭힘과 따돌림이 많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만 20~64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3.7%가 직장 내 괴롭힘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명 중 7명은 직장에서의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인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갑질은 기업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업종도 가리지 않는다. 오 위원은 "대기업은 물론 전문직에도 갑질은 일어난다"면서 "기자와 관련된 갑질 제보도 많이 들어오는데, 주로 데스크의 폭언과 과도한 업무량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투데이

오 위원은 갑질 제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제보자 보호'라면서 제보자의 용기가 꺾이는 것이 제일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직장 내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으면서, 관련 법도 제정됐다. 지난해 12월 28일에는 일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됐다. 이 법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으로,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해당 법에는 제보자를 보호하기 위한 내용도 포함된다.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신고하거나 피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제보자에게 해고 등 불이익 처우를 내린 경우에는 회사 대표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의 벌금을 물리도록 했다.

오 위원 역시 가장 중요하다고 꼽는 것이 '제보자 보호'다. 그는 "제보한 사람의 용기를 짓밟거나 꺾는 것이 제일 나쁘다"면서 "미투 운동과 마찬가지로 제보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완벽히 마련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투데이

최근 직장갑질119가 만든 '갑질지표'가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기업별로 68개의 문항을 평가하는 것으로, 갑질 정도가 가장 심한 기업일수록 100점이고, 그 반대일수록 0점이다. 오 위원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전체 기업의 평균 갑질지수는 35점이다. 그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기업의 지수는 10점 이하다.

2017년 말 촛불집회 이후, 각계각층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욕망이 커졌고, 당시 노동에 관심 있던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만든 것이 직장갑질119다. 기업과 정부의 후원금은 물론이고 수익 사업도 없는 공익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오 위원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직장갑질119는 단순히 상담만을 위한 단체가 아닌, 기업과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 위한 단체입니다. 전체 기업의 갑질지수를 매년 낮추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투데이/나경연 기자(contest@etoday.co.kr)]

▶프리미엄 경제신문 이투데이 ▶비즈엔터

Copyrightⓒ이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