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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보이나요? 26만장 비닐로 만든 '비너스의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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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조던

어떤 말은 너무 뻔해서 그냥 직접 보여줘야 한다. 미국 생태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56)이 비닐봉투 26만장을 점점이 배열해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을 재창조하거나 5만개 플라스틱 라이터 사진을 모자이크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패러디한 이유다. "26만장 비닐봉투가 10초마다 전 세계에 버려진다. 5만개의 라이터가 지구 해양의 매 제곱마일마다 떠 있다. 모두가 환경오염을 인식하곤 있으나 그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하는 게 내 일이다."

조던의 개인전 '아름다움 너머'가 22일부터 5월 5일까지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 20일 만난 조던은 "대량 소비와 낭비가 세계를 파괴하는 방식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며 "사람들이 이 같은 나쁜 소식을 더는 견디지 못하게 하는 건 우리를 압도하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미추(美醜)를 아우르는 전시가 마련된 것이다. 체코의 눈 덮인 나무 숲('슈마바 숲')과 나무 속살처럼 촬영한 114만장의 종이봉투('종이가방')를 나란히 병렬 배치하는 식이다. "망가짐과 아름다움의 균형, 이 가운데를 찾아야 한다."

조선일보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을 패러디한 작품 ‘비너스’ 앞에 선 크리스 조던. 비너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최근 한국을 덮친 미세 먼지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며 “조만간 이 주제로 작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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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점의 사진은 자세한 시선을 요한다. 말 그대로 표면에 눈을 들이대야 한다. 통계적 수치에 따른 미적 재배열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서 매분 소비되는 전기 ㎾ 수치(백열전구 32만개)는 우주 행성, 매주 접수되는 개인 파산 신청 건수(신용카드 2만9000장)는 보름달로 형상화된다. 미국 전역의 고준위 방사성 핵폐기물 규모를 형상화한 6만7000개의 버섯구름 이미지로 타이태닉호를 묘사하기도 했다. "'타이태닉'은 오만한 인간의 몰락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 예술은 사람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까. 본질적 감정, 사랑 말이다." 입장료 전액은 '플라스틱 제로' 캠페인 기금에 사용된다.

사진작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밑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그는 로스쿨 졸업 후 10여년간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2003년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변호사를 그만두는 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안락하고 예상 가능한 내 인생의 지도가 더 무서웠다." 환경문제에 천착하던 그는 2009년 북태평양의 작은 섬 '미드웨이'로 떠났다. 전 세계 온갖 쓰레기가 모이는 이 섬에서 플라스틱으로 내장을 채운 채 죽은 앨버트로스 사체를 찍어 명성을 얻었다. "어떤 조작도 없다. 이건 인간의 거울이다." 영화로도 촬영해 지난해 '앨버트로스'를 발표했고, 런던 세계보건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도 상영된다.

현재 그는 아들과 함께 책 '하나만을 바라보다'를 집필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크리스 조던, 아름다움의 눈을 통해 절망의 바다 그 너머로'를 국내 출간했다. "봐야 한다. 자세히 봐야 한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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