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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한국 최초 여성화가이자 페미니스트, '나혜석'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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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기자]
문화뉴스

나혜석(결혼 직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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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뉴스 MHN 이채원 기자]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로 알려진 한국 대표 여성 예술가이다.


나혜석은 여성해방과 여성의 사회참여 등을 주장하며 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해 왔지만,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 시대상으로 인해 냉대받았다.


이처럼 시대 상황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던 안타까운 삶을 산 나혜석이 성평등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나혜석의 일생과 그녀의 작품, 그리고 그녀가 추구하던 '신여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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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항구,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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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일생


나혜석은 1896년 한 부유한 가정에서 2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당당한 여성 화가와 지식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내비쳤다고 알려진다.


이후 1913년 진명여고보에서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진보적인 신념을 가졌던 부모님의 교육 하에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의 서양화과에 진학하게 된다.


조선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분위기의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나혜석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겠다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기 시작했다.


당시 유학 중 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하며 학비를 보내주지 않기도 했는데, 이러한 뜻에 따르지 않으려 한 나혜석은 스스로 1년간 돈을 모아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1918년 그녀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며 신여성으로서의 삶을 그려냈다.


또 1919년 일어난 3.1운동에 여학생들의 참가를 이끌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5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0년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연애결혼은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나혜석은 결혼을 통해 전통적 관습을 타파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혜석은 결혼 11년차인 1930년, 남편 김우영과 최린의 불륜으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명예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특히 그녀가 1934년 발표한 '이혼고백서'로 인해 더욱 큰 세상의 비난과 마주해야 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에서 남편이 성적으로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설명했는데, 당시 여성은 자신의 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의 작품은 예술세계에서 외면당하게 되었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혜석은 사찰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1948년 가난으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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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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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예술활동


나혜석은 그림과 글, 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활동을 펼쳤다.


나혜석이 발표한 소설에는 '경희'(1918)와 '정순'(2018), '회생한 손녀에게'(1918), '원한'(1926), '현숙'(1936), '어머니와 딸'(1937) 등이 있다.


또 '광'(1918), '인형의 집'(1921), '냇물'(1921), '노라'(1926), '아껴 무엇하리 청춘을'(1935) 등의 시를 발표했다.


그녀는 수필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펼쳤는데, 모두 74편에 달하는 수필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작은 '이상적 부인'(1914), '아우 추계에게'(1927), '이혼 고백서'(1934), '신생활에 들면서'(1935) 등이 있다.


또 그녀는 도쿄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던 만큼 다양한 미술작품도 남겼다. '스페인항구', '무희(캉캉)', '자화상', '농촌 풍경', '파리 풍경' 등 인물화와 풍경화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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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희,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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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 추구한 '신여성'


나혜석이 펼친 예술의 형식은 각각 달랐지만, 이 모든 작품들의 중심에는 '성평등'과 '주체적 여성'이 담겨 있었다.


특히 나혜석의 대표 소설 '경희'에 '신여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메세지를 담았다.


나혜석이 작품활동을 하던 당시 조선의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했다. 아내와 어머니의 삶에서 더 나아간 주체적인 역할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연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비판하고자 한 나혜석은, 소설을 통해 여성은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존재가 아니며,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이념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녀의 연애와 결혼생활 역시 '신여성'으로서의 삶을 보여준다.


그녀는 조혼과 중매결혼이 당연하던 당시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원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며 인생을 보냈다.


그녀의 첫사랑은 최승구 시인이었는데,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최승구는 집안에서 맺어준 아내와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기에 세간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후 최승구는 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김우영을 만나게 된다.


김우영 역시 당시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혼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혜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에서 맺어주고자 하는 남편이 아닌 김우영과 연애결혼을 하게 된다.


이 때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을 하기 위한 조건을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조건은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게 할 것,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줄 것'이었다.


수동적인 것을 최고로 여겼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후 남편 김우영이 최린과 불륜을 저지르고 이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된 나혜석은 수필 '이혼 고백서'를 통해 또 한 번 주체적인 여성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혼고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중략)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또한 여성은 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과 남편의 성 생활에 대해 발표했다.


그녀가 이처럼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면서 세상의 비판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3.1 운동에 여학생들을 참가시키기 위해 조직을 꾸리던 그녀는 일본 경찰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고, 다양한 문학과 미술 작품은 그녀의 주체적 사상으로 인해 외면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며 수백 년간 지켜져 온 정조관념을 깨부수고 여성해방론을 부르짖었다.


이로 인해 나혜석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받고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여성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그녀의 노력이 오늘날의 성평등 운동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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