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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한글 창제는 왕실·집현전·불교계의 팀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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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정광]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 출간

"한글 창제라는 민족사의 드라마에서 감독과 주연은 세종대왕이고, 신미(信眉) 스님은 훌륭한 조연일 뿐이다."

정광(79)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글 창제 과정을 연구해온 국어학자다. 특히 그는 2015년 '한글의 발명'(김영사)에서 "한글이 고대 산스크리트어(語)나 원(元)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명으로 창안한 파스파(八思巴) 문자의 체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파격적 주장으로 학계의 찬반 논쟁을 일으켰다. 최근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개봉 이후 한글 창제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관심이 높다. 최근 학술서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지식산업사)을 펴낸 정 교수의 서울 중계동 연구실을 찾아 의문점들에 대해 물었다.

조선일보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가 29일 서울 중계동 연구실에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펼쳐 놓고 한글 창제 과정과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최근 학술서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을 펴냈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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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한 것은 사실인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르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가치관에 충실했던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 스님은 대체로 '간승(奸僧)'처럼 부정적 수식어로 묘사됐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공부하고 산스크리트어에도 조예가 깊은 학승(學僧)에 가깝다. 신미는 훈민정음 창제 전체를 도맡았다기보다는 후반 과정에 참여해 모음 11자를 만드는 데 공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인가.

"세종은 한글 창제 과정에서 당시 요동으로 유배된 명나라의 음운학자인 황찬(黃瓚)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신숙주·성삼문 같은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여러 차례 보냈다. 한밤중에 집현전에서 잠들어 있던 신숙주에게 세종이 직접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는 일화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다만 최만리의 격렬한 반대 상소가 보여주듯이 집현전의 중론은 반대에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은 신뢰할 수 있는 집현전 일부 소장학자를 호출한 것이다."

조선일보

최근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던 영화 '나랏말싸미'의 세종(송강호·왼쪽)과 신미 스님(박해일).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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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세종의 두 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과 안평대군도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실제로 한글 창제는 세종의 일가족이 대부분 동원된 '패밀리 비즈니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불심이 깊었던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수양대군이 신미 스님 등과 함께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옮긴 것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이를 보고 한글 표기의 가능성을 확인한 세종이 직접 한글로 지은 찬불가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또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는 한자를 한글로 옮길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난제(難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세종의 일가족이 한글 창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라는 천재가 혼자서 신통력을 발휘했던 마법이나 기적이 아니라 왕실과 집현전 학자, 불교계까지 총동원한 '팀 플레이'에 가깝다."

―한글이 산스크리트어나 파스파 문자에서 영향받았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는가.

"간다라 불교 미술 양식이 인도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을 거쳐 신라의 석굴암에서 완성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집대성했지만 조선 시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의해서 꽃을 피웠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 한글 역시 마찬가지다. 산스크리트어나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 자칫 편협한 국수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세종대왕 주도하에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해서 과학적이면서도 백성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담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점에 한글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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