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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만학도 할머니들의 51가지 ‘인생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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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민물게 찌개·식혜…

추억 담긴 음식 레시피 모아

사연과 함께 요리책 출간해

문 대통령 SNS로 화제

경향신문

요리책 <요리는 감이여>의 저자 중 한 명인 송명예씨(84)가 종이에 소고기미역국 만드는 방법을 적고 있다. 충남교육청 평생교육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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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게를 씨어(씻어) 쭉쭉 찢어 놓는다. 누런 알이 둥실둥실 떠오르도록 어지간히 끓인다. 설(충분하지 않게) 끓이면 비려∼.” 생애 처음 한글을 깨친 김송자씨(77)가 손글씨로 눌러쓴 ‘논두렁 민물게 찌개’ 조리법이다. 한국전쟁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한 김씨는 “어렸을 때 친정엄마가 논두렁에서 게를 잡아서 끓여줬던 요리”라며 “작고한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메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것도 특별한 레시피(조리법)도 없다. 민물게 1∼2마리, 주먹만 한 호박 1개 등 재료를 그램(g) 단위로 계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한번 따라 해보고 싶어진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맛으로 입이 호사를 누렸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조리법은 한글을 배운 평균연령 75세인 충남지역 할머니 51명이 자신만의 비법을 담아 펴낸 요리책 <요리는 감이여>에 담겨 있다. 책에는 각자 추천한 요리의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는 법 등과 음식에 얽힌 추억이 배어 있다.

할머니들의 요리책에는 인생사도 있다. 한글을 배울 수 없었던 사연부터 힘든 시절 자식들을 키운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질경이 장아찌를 소개한 이순례씨(73)는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을 돌보느라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이씨는 “아기였던 동생을 업고 교실 뒤쪽 바닥에 앉아서라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동생이 울어대는 바람에 학교에 간 지 이틀 만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사찰에서 만들었던 식혜 레시피를 소개한 주미자씨(78)는 일본에서 태어나 3세 때 한국으로 왔지만 한국전쟁 당시 부모를 잃었다. 형제도 없었던 그는 오갈 데 없이 떠돌다 절에서 스님들의 일을 도우며 살았다. 주씨는 오전 3시30분쯤 일어나 오후 9시까지 절에서 일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못 배운 게 한으로 남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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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씨는 <요리는 감이여> 출간 후 청와대로 손편지를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을 오는 22일 예정된 졸업식에 초대하고 직접 만든 식혜도 대접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페이스북에 요리책과 주씨의 편지 사진을 올리고 할머니들의 향학열을 응원했다. 문 대통령은 “78세의 주미자 할머니와 81세의 이묘순 할머니가 뒤늦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사연을 연필로 쓴 편지로 보내오셨는데, 글씨도 반듯하게 잘 쓰시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정확했다”면서 “중학교·고등학교까지 계속 (공부)하겠다는 향학열을 보여주셔서 가슴이 뭉클했다”고 적었다. 이 책은 할머니들이 충남교육청 평생교육원과 부여도서관, 유구도서관에서 열리는 초등학력인정과정 등에 참가해 한글을 배운 뒤 만들었다.

권순재 기자 sjkw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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