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은 통한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게임업계에서도 통용된다. 어설프게 못 만든 게임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만, 그 정도가 극에 달하면 도리어 명작으로 칭송받는 것이다. 이 자리에 오르는 것은 GOTY 수상보다도 어렵다. 대놓고 최고 망작이 되고자 하는 잔챙이들이 간혹 출시되지만, 그 대다수는 지하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못한다. 그야말로 노력과 운, 시대적 요소가 모두 합쳐져야만 겨우 오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여기 그 치열함을 뚫고 선정된 5개의 게임이 있다. 하나같이 발매 당시엔 게임업계를 충격에 빠뜨리며 흥행에 실패한 작품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암흑의 GOTY 명작들이다. 최근 쏟아지는 신작 홍수에 디지털 라이브러리에 게임만 잔뜩 쌓아 놓는 ‘게임 불감증’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에게 이 게임들을 적극 추천한다. 게임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되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TOP 5. PS1이 아니고 PS4 게임이라고? 라이프 오브 블랙 타이거
국내 개발사인 하나게임즈가 PS4로 낸 ‘라이프 오브 블랙 타이거’는 2017년작으로, 오늘 소개할 게임 중에선 가장 신작이다. 굳이 연도를 언급하는 이유는, 영상이나 스크린샷만 보고 이 게임을 PS1이나 그 전 시절 고전게임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다. 사실 콘솔 발매 1년 전 모바일로 먼저 나온 작품이긴 한데, 이 퀄리티로 PS4의 문턱을 넘었다는 것이 꽤나 신기하다.
게임은 단순하다. 검은 호랑이를 조작해 각종 미션을 클리어하며 야생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호랑이는 이동 시 8방향을 바꿀 때마다 순간적으로 휙휙 돌아가는 멋진 조작감을 자랑하며, 앞발을 휙휙 휘두르면 앞에 있는 사람이나 늑대, 물고기가 휙휙대며 나자빠지는 세기의 연출,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 없이 휙휙 지나가는 스토리 구성까지. 출시되자마자 이 게임은 PS4를 넘어 현세대 콘솔 사상 최악의 게임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이쯤 되면 ‘두유노~’ 클럽 가입 조건도 충분할 것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가격은 AA급 인디게임 수준인 2만 8,900원이다.
▲ 멋지게 언덕을 내려가는 블랙 타이거 (사진출처: 공식 트레일러 영상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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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4. 일본에서 ‘쿠소게임’ 하면 단연 1순위, 데스 크림존
일본에서는 못 만든 게임을 ‘쿠소게’라 지칭한다. 그 중에서도 최고봉에 달한 게임이 바로 ‘데스크림존’이다. 1996년 세가 새턴으로 발매된 이 건슈팅 게임은 당시 ‘버추어 캅’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받았다. 그러나 적과 오브젝트의 구분도 어렵고 눈만 아픈 그래픽,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짜증나는 날다람쥐와 민간인(맞추면 라이프 -1), 괴랄하게 높은 난이도, 청각을 괴롭히는 사운드 등으로 인해 희대의 똥겜으로 내려앉았다.
그 중 백미는 조작감이다. 세가 새턴용 건 컨트롤러 ‘버추어 건’을 대응한 게임이었음에도 조준점과 전혀 다른 곳에 총이 발사되었기에 정상적인 감각으로는 플레이가 불가능했다. 설정에서 조준점을 조절해도 총 한 발을 발사하면 리셋되는 악랄한 시스템은 덤. 묘하게도 시간이 흘러, 이 같은 모든 요소는 게이머들의 도전심을 자극시켜 ‘크림조너’라 불리는 마니아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개발사는 이 게임이 화제를 모으자 괴악한 요소를 잔뜩 때려넣은 2편을 발매했는데, 그새 개발력이 상승했는지 의외로 정상적인 작품이 나와 버려 오히려 팬들을 실망시켰다.
▲ 지금 보면 상당히 개성 넘치는 그래픽이다 (사진출처: Drastic Actions 유튜브 영상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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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3. 버그콤보 싸움이 된 ‘북두의 권’ 아케이드 대전게임
대전격투게임에서 밸런스는 중요한 문제다. 얼핏 생각하면 밸런스가 완벽해야 좋을 것 같지만, 일각에선 적당히 밸런스가 기울어져 있어야 게임이 흥한다는 얘기도 있다. 뭐가 맞는 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아예 밸런스를 포기하고 사기로 첨철시키면 오히려 흥할 수 있다. 아크시스템웍스가 개발해 2005년 아케이드로 출시된 ‘북두의 권(콘솔버전명: 북두의 권-심판의 쌍창성 권호열전)’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게임은 그야말로 대전격투게임에서 해선 안 될 것을 총집결시킨 막장 밸런스를 자랑한다. 캐릭터 중 하나인 ‘토키’는 발매 직후부터 상대방을 4초 만에 K.O. 시키는 사기적 성능을 자랑했으며, 이후 연구가 진행되자 게임 내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바운드 시스템을 이용해 이러한 버그성 콤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야말로 특정 캐릭터 밸런스가 아닌 본바탕이 문제였던 것. 결국 이 게임은 기괴한 버그로 무장한 캐릭터들의 콤보 정확히 입력하기+게이지 관리 라는 희한한 대결 구도가 되어버렸고, 이 세기말적 광경이 컬트적인 인기를 얻으며 인기 역주행에 성공했다. 일단 흥했으니 다행이긴 한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니 절대 따라하진 말자.
▲ 그러니까, 대충 이런 게임이다 (사진출처: LordMike HnK 유튜브 영상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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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2. 미국 게임업계 멸망의 신호탄이 된, E.T.
위 게임들의 영향력은 단순히 자기 자신, 혹은 같은 장르에만 미쳤다. 그러나 이 게임은 당시 게임업계 전체를 망가뜨렸다. 그 이름도 유명한 ‘아타리 쇼크’를 촉발시킨 주인공, ‘E.T.’다. 1982년 전세계를 강타한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E.T.’를 원작으로 한 게임으로, 게임화 판권에만 무려 2,000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알려졌다.
이 게임이야 워낙 유명하니, 설명은 굳이 길게 하지 않겠다. E.T.처럼 보이지 않는 괴생명체가 뭐가 뭐인지 구분가지 않는 맵에서 점으로 표시된 뭔가(통신기라고 한다)를 찾아 SOS 신호를 보내는 괴악한 게임. 안 그래도 품질이 하락해 가는 아타리 게임들로 인해 쌓여 가던 유저 불만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이 게임을 신호로 미국 게임시장은 거의 붕괴했으며, 수백만 장의 ‘E.T.’ 재고는 뉴멕시코 사막에 매립됐다. 그때 묻힌 카트리지는 2014년 ‘E.T.’가 전설이 되었을 무렵 발굴되었는데, 이 게임의 역사적 가치 덕에 경매에서 수천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고.
▲ E.T. 게임에 대한 이미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사진출처: ‘아타리: 게임 오버’ 다큐멘터리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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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 이쯤 되면 해 보고 싶다, 빅 릭스: 오버 더 로드 레이싱
앞서 말한 ‘데스 크림존’이 일본 ‘쿠소게’ 최강자라면, 이번에 설명할 ‘빅 릭스: 오버 더 로드 레이싱’은 서양에서 이 분야 끝판왕이다. 게임 산업의 역사가 오래된 서양에서 2003년 발매된 게임이 최강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빅 릭스’의 위엄을 알 수 있다.
‘빅 릭스’는 일단 화물이 가득 실린 트레일러 트럭을 운전해 경찰을 따돌리며 레이싱을 벌이는 오픈 월드 레이싱 게임을 표방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나름 괜찮아 보이지만, 문제는 이게 포장지에서만 그친다는 점. 실제로는 화물 따윈 없는 빈 트럭으로(!!), 경찰 없이 나 홀로(!!), 빈 트랙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끝나는 게임이다. AI로 보이는 상대방 트럭들은 경기가 시작해도 움직이지 않고, 충돌 판정이 없어 모든 오브젝트를 통과한다. 벽이나 절벽에서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속도를 내는 등 물리엔진도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상대가 없으니 패배도 없고, 심지어 5개 코스 중 4번째 코스는 데이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함정이라 고르는 순간 튕긴다. 심지어 후진 시에는 제한 속도가 없이 무한 가속돼 광속 정도는 순식간에 돌파한다.
위 설명을 읽다 보면 왠지 ‘이거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런 이유에서 ‘빅 릭스’는 음지에서 꽤나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웹 상의 리뷰만 봐도 이 게임을 통해 철학적 깨달음을 얻었다느니 인생을 담은 게임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종종 들릴 정도. 이쯤 되면 그야말로 ‘게임은 예술입니다’ 라는 말에 딱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 패키지에 쓰인 약속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제목마저도 (사진출처: 위키디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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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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